제목
■. 朝鮮前期 釜山 東萊縣 科學者 蔣英實 展示場 踏査 後!
작성자
송철효
작성일
2011-12-26
조회수
1251

■. 朝鮮前期 釜山 東萊縣 科學者 蔣英實 展示場 踏査 後!

 

 

▲. 槪 要 : 1. ∼ 10.

 

1. 日    字 : 2011年 11月 27日.

2. 場    所 : 釜山 東萊縣 科學者 蔣英實 展示場.

3. 主    催 : 全州 歷史博物館.

4. 主    管 : 全州 歷史博物館.

5. 目    的 : 우리나라 科學의 發展相 涵養.

6. 人    員 : 40名.

7. 氣    候 : 늦은 가을.

8. 寫    眞 : 添附 하였습니다.

9. 作    成 : 文化財 訪問敎師 龍湖 宋 哲 孝.

10.槪   括 : 序    言.

 

 

2011년 11월 27일 오늘은 朝鮮前期 卑賤한 身分에도 不具하고 타고난 蔣英實은 才能과 技術로 科學技術 水準을 飛躍的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役割을 했던 蔣英實 展示場을 踏査하였습니다. 本貫은 牙山 아버지는 歸化한 中國人이며 어머니는 妓女였습니다. 東萊縣의 官奴로 있다가 뛰어난 技術才能으로 拔擢되어 1423年(世宗 5) 奴婢 身分을 벗고 尙衣院別座로 任命되었습니다. 1424年 中國의 체재를 參考하여 물時計를 만들어 그 功으로 행사직(行司直)이 되었습니다. 1432年 김돈(金墩)·이천(李) 等을 도와 간의대(簡儀臺)의 製作에 着手하고 各種 天文器機의 製作을 監督했습니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같은 해 06월 혼천의(渾天儀)를 完成했으며 이듬해 김빈(金)과 함께 自動時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습니다. 11世紀 宋의 소송(蘇頌)이 製作한 天文時計裝置와 Arabia 時計의 自動時報裝置에 影響을 받은 이 時計는 時·更·點에 따라서 自動的으로 鍾·북·징을 쳐서 時報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1434年 07月 01日부터 使用된 標準時間은 自擊漏에 맞추어 運用되었으며 같은 해 金屬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缺陷을 補完한 갑인자(甲寅字) 製作을 監督했습니다. 1437年 天體觀測用 器具인 대·소간의(大小簡儀)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携帶用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測定하여 晝夜兼用 時計로 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太陽의 高度와 出沒을 測定하는 규표(圭表) 等을 完成했으며 다음해 自擊漏의 一種인 옥루(玉漏)를 製作 完了하고 慶尙道 채방별감(埰訪別監)이 되어 銅·鐵의 採鑛·製鍊을 指揮 監督했습니다. 1441年 降雨量 測程器인 측우기(測雨器)와 河川 水位 測程器인 수표(水標) 製作을 監督 完成했고 상호군(上護軍)으로까지 特進했으나 1442年 그의 監督으로 製作된 王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投獄 罷免 當했습니다. 朝鮮 世宗 때의 科學者 동래현(東萊縣)의 官奴였으나 科學的 才能이 뛰어나 拔擢되어 簡儀·渾天儀 따위의 天體 觀測器와 仰俯日影 · 欽敬刻의 옥루(玉漏)와 같은 時計 및 世界 最初의 雨量計인 測雨器와 수표(水標)를 만들어 科學 發展에 貢獻하였습니다.

 

 

▲. 內     容 : 1, 2, 3.

 

1. 물시계는 물의 增加量 또는 減少量으로 時間을 測定하는 裝置로서 三國時代부터 나라의 標準時計로 使用하였으며 朝鮮 世宗 16年(1434) 蔣英實에 의해 定해진 時間에 鍾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製作되었으나 오래 使用되지는 못하였고 中宗 31年(1536)에 다시 製作한 自擊漏의 一部가 現在 남아 있고 물시계의 原理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漸漸 올라가 미리 定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裝置해 놓은 지렛대 裝置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次例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鍾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人形이 나타나 時刻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調和를 이루던 部分이 없어진 채 물통 部分들만 남아 있습니다. 靑銅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며 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昌慶宮 國寶 第 226號 앞면 5칸 옆면 3칸의 單層 팔작지붕 建物로 明政殿 뒤에 2個가 남아 있으며 現在 中國 광동에 남아 있는 明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規模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貴重한 遺物로 評價되고 있습니다. 蔣英實科學財團은 科學 先賢 蔣英實先生의 科學史蹟 業績을 宣揚하고 科學思想과 傳統技術을 繼承 發展시켜 科學技術文化의 振興에 寄與하며 全 國民의 1人 1技 生活化를 通해 國民生活 科學化에 一助함으로써 科學立國의 實現에 寄與함을 目的으로 2000年 03月 24日 設立 許可된 大韓民國 敎育科學技術部 所管의 社團法人이며 蔣英實技術文化財團은 科學技術硏究能力의 培養과 産業化 科學敎育의 振興 및 科學技術 및 産業化의 國際交流를 增進하게 함으로써 科學技術의 暢達 振興 및 高 附加價値 技術의 産業化를 通해 國家 競爭力 培養과 發展에 寄與하게 함을 目的으로 2004年 07月 13日 設立 許可된 大韓民國 敎育科學技術部 所管의 財團法人입니다.

 

 

2. 蔣英實의 主要 發明品들을 列擧하면 다음과 갔습니다. ⑴. 渾天儀 天體의 運行과 位置 그리고 赤道 座標를 觀察하는데 쓰이던 天體 觀測氣球로서 渾儀 또는 璇璣玉衡이라고도 하며 1432年(世宗 14年) 世宗大王의 命에 의하여 鄭麟趾, 鄭招, 等이 古典에 依據하여 製作에 着手하였고 1433年(世宗15年) 蔣英實, 이천에 의하여 完成되었으며 ⑵. 觀天臺 朝鮮時代 觀測 天文臺로 現在 昌慶宮에 觀天臺 等 2個가 남아 있으며 ⑶. 仰釜日晷(오목해시계) 햇빛의 그림자로 時間을 재는 時計로서 一名 해시계 또는 仰釜日影이라고 하며 1334年(世宗16年) 世宗大王의 命으로 蔣英實이 製作하여 欽敬刻에 처음 設置하였습니다. ⑷. 自擊漏(물시계) 1434年(世宗16年)에 蔣英實 等이 製作한 물시계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저절로 움직여 時間을 알려주는 裝置를 附着 製作하였던 것으로 이 自擊漏는 1536年(中宗31年)改良되었으나 지금은 複雜한 自動時報裝置가 없어지고 3個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통만 남아 德壽宮에 保存되어 있습니다. ⑸. 簡儀 1276年 中國 元나라 때 처음 만들어져 1437年 오늘날의 天文觀測器機와 같은 原理로 改良된 天文器機로서 行星과 별의 位置를 精密하게 測定할 수 있으며 壬辰, 丁酉倭亂으로 遺失된 後 最初로 復元되었습니다. ⑹. 규표 一年의 길이가 正確히 몇 날 인가와 24節氣를 알아내기 위해 使用하던 道具로 垂直으로 세운 막대표의 그림자 길이를 基準으로 冬至, 夏至, 春分, 秋分이라 하고 나머지 20個 節氣를 그 사이에 若 15日 間隔으로 配列한 것입니다. ⑺. 水標 1441年(世宗 23年)에서 1442年에 걸쳐 製作, 서울 淸溪川과 漢江에 設置한 河川 水位 測定計입니다. 世宗代의 처음 水標는 나무 기둥에 자, 치, 푼의 길이를 表示하고 돌기둥 사이에 묶어 河川에 세운 半 木材였으나 그 後 石材로 改良하였습니다. ⑻. 測雨器 비가 내린 量을 재는 器具로 1441年(世宗 23年) 發明된 世界 最初의 雨量計이며 그 以後 서울과 地方에 이를 設置하여 雨量을 記錄하게 하였으며 農事에 參考하도록 하였습니다. ⑼. 風旗臺 바람 方向과 세기를 測定하는 바람 깃발이다. 이는 우리 손으로 만든 獨特한 氣象觀測機器의 하나입니다. ⑽. 일구대 암부일구(해시계)를 올려놓은 받침대로 그 위에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하여 12 동물로 시각을 그려 놓은 앙부일구를 제작 설치하였다.

 

 

3. 이는 우리나라 最初의 공중시계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일성정시의 1437년(世宗19년)에 이천 蔣英實 等이 만든 천문기기로 밤과 낮의 時間을 測定할 수 있는 時計이다. 活字(甲寅字) 甲寅字는 1434년(世宗16년)에 王名으로 이천 등이 製作한 銅活字로 일명 위부인자라고하며 現在 전해지지 않고 다만 인쇄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종 11년(1429년) 12월에 박서생이 通信士로 日本에 가서 보고 온 日本 수차(水車, 물레바퀴)에 대한보고는 조선의 수차제도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수차는 물살이 센 곳에서는 저절로 돌아가고 물살이 약한 곳에서는 발로 밟아주어야 돌아가기는 하지만 발의 힘만으로 돌려야 하는 우리의 수차보다는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때부터 世宗은 수차의 모형을 만들어 全國的으로 보급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수차 製作에 쓰일 적절한 목재가 없었다는 점과 제방 중심의 수리 관리체제로 인하여 수차는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농민들이 가난 때문에 수차를 만들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점도 수차의 보급을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蓄積된 物理學的 原理와 技術들은 자동 장치 의 發明을 가능하게 하였다. 世宗 6년(1424년) 05월 景福宮에 설치된 청동제 물시계는 蔣英實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自動的으로 시간을 알리는 장치가 부착된 것이었다. 奴婢 出身의 蔣英實은 그 후 世宗 16년(1434년) 06월 좀 더 개선된 새로운 자동 시보장치의 물시계를 완성하게 되는데 이를 자격루라고 한다. 자격루의 자동 시보 장치는 떨어지는 물을 받는 물통에 부전이라는 쇠 화살이 떠있어 그것이 정해진 시각마다 쇠구슬을 굴러 떨어지게 하여 목인(木人, 나무인형)이라는 타종장치를 작동 종을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 장치가 안으로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작동이 귀신과 같아서 보는 사람마다 감탄했다고 한다.

 

 

▲. 結     論.

 

 

世宗이 蔣英實에게 부탁 한 가지를 하였습니다. 가마가 불편하니 그것을 타고 내리기 편하게 고쳐 주오. 좋은 가마를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蔣英實은 가마를 만드는 일에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가마를 크게 하고 문을 양쪽에 달아서 드나들기 편리하게 해야지. 또한 가마의 階段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階段式으로 하려고 蔣英實은 細密히 設計하여 製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리하여 蔣英實은 世宗이 타는 새로운 가마를 만들었습니다. 과연 그대의 솜씨는 참으로 훌륭하오! 세종은 새 가마를 타고 宗廟를 떠나 창덕궁 쪽으로 향했습니다. 가마가 敦化門에 가마가 이르렀을 때 가마꾼들이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중심을 잃었습니다. 우지직 가마가 부서지고 세종이 땅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蔣英實은 義禁府로 잡혀가서 곤장 1백 대의 형을 받았습니다. 世宗은 그 소식을 듣고 蔣英實의 형을 가벼이 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蔣英實은 곤장 80대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뒤 蔣英實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관노가 되었던 蔣英實이므로 태어난 연대조차 모릅니다. 다만 세종을 도와 과학에 이바지한 그의 공로만이 찬란히 빛날 뿐입니다. 조선(朝鮮) 시대(時代) 4대 세종(世宗) 때의 과학자(科學者) 본은 아산(牙山) 세종(世宗)을 도와 간의(簡儀)ㆍ혼천의(渾天儀)ㆍ等의 천체(天體) 관측기(觀測器)와 앙부일영(仰釜日影)ㆍ자격루(自擊漏)ㆍ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等)의 시계를 만들었으며, 흠경각(欽敬閣)을 세우는 등(等) 과학(科學) 발전(發展)에 공헌(貢獻). 1441년 세계(世界) 최초(最初)의 우량계인 측우기(測雨器)와 수표(水標)를 발명(發明) 그 공으로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에 올랐으며 15세기 조선에서 사용되던 기계 장치는 주로 방적 기계 관개용 양수기 자동물시계 물레방아 요업(도자기 제조업) 및 공예용 물레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들 기계 장치 중에서 가장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양수용 물레바퀴였다. 그것은 사람의 힘이 아닌 물의 힘에 의하여 기계의 동력을 얻으려는 科學的 努力이었다.

 

 

4. 感謝 합니다! 2011年 11月 29日. 文化財 訪問敎師 龍湖 宋 哲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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