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13.04■. 陵園!
작성자
송철효
작성일
2013-01-07
조회수
1452

13.04■. 陵園!

 

●. 陵園은 왕과 왕족의 무덤 및 그 부속시설.

 

 

괘릉

 

▲. 掛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왕릉으로 사적 제26호 원형의 봉토분으로 앞에 석상(石床)을 놓았고 아랫부분의 주위에는 다듬은 석재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12지신 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그리고 호석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정도의 판석(板石)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갑석(甲石)을 얹었고 각 판석 사이에는 호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시키는 탱석(撑石)을 끼워 넣었으며 12지신 상을 2개의 판석마다 하나씩 배치했다. 또한 호석의 바깥쪽 바닥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정연하게 돌려 깔았으며 봉토 주변을 둘러 석주(石柱)를 세우고 석주와 석주 사이에 2개씩 돌난간을 끼웠다. 비교적 얕게 부조한 12지신 상은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며 오상(午像)만이 정면(남쪽)을 보고 있다. 또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辰巳)의 6상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미신유술해(未申酉戌亥)의 5상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즉 양 측면에서 모두 오상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는 배치를 취했다. 봉분 주위에 이렇게 12지신 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 특유의 양식이며 특히 掛陵의 12지신 상은 統一新羅時代의 것으로는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또 統一新羅時代의 王陵으로 가장 잘 갖추어진 형식으로 평가되는 掛陵은 능 입구에 세워진 석상(石像)으로도 유명하다. 封墳에서 남쪽으로 약 80m 정도 떨어져서 길 양쪽에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2쌍 각기 1쌍씩의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그리고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배치했다. 統一新羅時代 석조물로는 그 조각수법으로 보아 극히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며 특히 강한 인상을 주는 무인상은 얼굴생김이나 표정 수염 등으로 보아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것으로 판단되어 당시 新羅人들의 국제적인 교역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데서 주목을 끈다. 掛陵은 新羅 제38대 元聖王의 능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元聖王의 陵은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洞鵠寺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崔致遠이 지은 대 숭복사 비문에 따르면 원래 신라 귀족 김원량(金元良)이 자신의 별장을 희사하여 곡사라는 절을 만들었으나 元聖王이 죽으면서 장지(葬地)로 선정되어 절을 옮겼고 景文王 때는 능역(陵域)의 수호에 각별한 정성을 들였으며 憲康王 때에 와서 옮긴 절의 이름을 대 숭복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의 掛陵 부근에는 숭복사터가 있으므로 掛陵을 元聖王 陵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다. 분류제왕과 후비의 무덤인 능(陵)과 태자나 세자 및 그 비의 무덤인 원(園)을 합쳐 부른 것이다. 능(陵) 능묘(陵墓) 또는 능침(陵寢)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경우 무덤에 흙을 쌓아올리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조경한 것은 춘추전국시대부터이나 그 기원은 좀 더 소급된다. 그리고 제왕의 무덤을 능이라고 부른 것은 전국시대부터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왕의 무덤을 일정한 격식에 따라 만들고 주위를 가꾼 것은 고구려 때부터인 것으로 확인된다.

 

●. 삼국시대의 능원.

 

 

공주 송산리 6호분

 

▲. 우리나라에서는 집권국가가 등장하는 三國時代부터 왕이나 귀족들의 대형고분들이 본격적으로 축조되고 일정한 형식에 따라 무덤 주변을 가꾸기 시작했으며 무덤을 관리하는 관리인을 설정했다. 高句麗 고분은 환인·통구·평양·황해도 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데 형식은 초기에는 돌무덤[石塚]을 5세기 이후로는 봉토분(封土墳)을 많이 썼다. 초기의 왕릉 급 무덤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은 방형 계단식 돌무지무덤[積石塚]이며 장군총(將軍塚)·태왕릉(太王陵)·천추총(千秋塚) 등이 대표적이다. 태왕릉의 경우 한 변의 길이가 63m에 달하는 대형인데 묘역 주변에 얕은 흙담이 둘러져 있고 정면에 사당을 세운 흔적이 있으며 뒤에는 공신이나 시종자가 묻힌 것으로 생각되는 2개의 작은 배총(陪塚)이 있다. 일부 무덤의 정상부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향당(享堂)을 설치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광개토왕릉 비문에 따르면 그 능의 관리를 위해 모두 330호(戶)의 수묘가(守墓家)가 설정되어 있어 일찍부터 국왕의 무덤을 일정한 형식으로 조성하고 관리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4세기말에서 5세기 초를 전후하여 나타난 봉토분의 내부구조는 주로 돌방으로 이루어진 벽화분이며 널방[玄室]의 좌우에 옆방[側室]이 딸린 것도 있으나 말기의 것에는 외방[單室]이 많다. 백제의 능묘는 대부분 고구려와 같은 돌방무덤 계통이지만 약간의 지역적 특색이 있다. 초기 중심지였던 서울 성동구 일대에 산재한 백제고분 중 석촌동 3호분과 4호분은 방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왕릉급 무덤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공주지방에도 많은 백제고분이 존재하는데 돌방무덤과 함께 벽돌무덤[塼築墳]이 섞여 있고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부여지방의 왕릉 급 무덤으로는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데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한 벽화가 발견되어 고구려와 계통적인 연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 신라의 고분은 경주 일대에 집중해 있는데 금관을 비롯한 풍부한 껴 묻 거리가 나온 바 있어 그 대부분이 王陵 級으로 짐작된다.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며 외형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합장(合葬)한 쌍무덤[雙墳]이 있어 특이하다. 특히 금관총(金冠塚)· 식리총(飾履塚)· 천마총(天馬塚) 등이 유명하다. 특히 신라에서는 6세기 초 지증왕 이전까지 국왕이 죽으면 남녀 5인씩을 순장시키는 제도가 있었고 7세기 중엽에는 능원을 관리하는 수릉인(守陵人)이 설정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도시의 발달에 따라 7세기 무렵부터 신라의 왕릉들은 주변의 구릉지로 옮겨 축조되기 시작했고 특히 문무왕의 경우는 화장한 뒤 수중릉(水中陵:대왕암)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통일신라기에 들어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바도 있어 큰 봉토분의 축조는 없어지고 돌방무덤과 화장 묘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 왕릉의 특징은 봉토 주위에 둘레돌[護石]을 두른 것이며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긴 판석을 두른 것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가장 완비된 형식이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생각되는 괘릉(掛陵)이다. 괘릉은 봉토 주위에 큰 판석을 둘러 세우고 그 사이에 12지신 상을 조각했으며 돌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봉분 앞에는 석상(石床)을 그 남쪽으로 돌사자 2쌍 문인석 2쌍 무인석 1쌍 서쪽에 석주 1개를 배치한 형식이다. 또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을 통해 주변에 나무를 심어 조경한 것이 확인되므로 당시 능을 조성하는 일정한 형식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짐작된다. 12지신 상으로 봉토를 장식하는 방식은 고려·조선으로 이어졌다.

 

●. 고려시대의 능원.

 

고려의 왕족들과 귀족들은 대부분 돌방무덤을 썼고 국왕의 능은 제릉서(諸陵署)를 두어 관리했으며 말기에는 경비군인 위숙군(圍宿軍)을 배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왕릉은 몽골 침입 등을 거치며 많은 수가 도굴되고 후대에 와서 보수를 했기 때문에 원형을 알기 어렵다. 왕릉의 대부분은 개성 주변의 산지에 있는데 누구의 능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19기이다.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은 헌릉(憲陵)·소릉(詔陵) 등이다. 왕릉은 능역의 좌우에 산이 둘러쳐 있고 앞으로는 내가 흐르는 곳에 자리 잡았는데 이는 당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풍수지리사상에 따른 것이다. 능역은 대개 동서 18m 남북 36m 정도 되는 구역의 3면에 돌담을 두르고 위에서부터 4개의 단을 만들어 최상부에는 석상(石床)과 망주석(望柱石)을 제2단에는 장명등(長明燈)을 사이에 두고 문인석을 세웠으며 제3단에는 무인석 제4단에는 정자각(丁字閣)과 능비(陵碑)가 있다. 봉분의 높이는 3~4m 정도 직경 6~9m 정도로 봉토 아래에는 면석(面石)과 12지신 상 밖으로는 돌난간과 석수(石獸)를 배치했다. 특히 벽화가 확인된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은 가장 완비되고 호화로운 것으로 꼽힌다.

 

●. 조선시대의 능원.

건원릉

 

▲. 朝鮮時代에는 陵園을 조성하는 형식이 정해져 국조오례에 실려 있다. 장지(葬地)는 사전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喪)을 입은 뒤에 지관(地官)으로 하여금 묘지를 택하게 했는데 능원의 大部分은 서울 일원에 있다. 그러나 朝鮮時代에는 능원을 조성한 뒤에도 風水地理思想에 따라 불길하다고 판단되면 옮기는 경우가 있었다. 형식은 원형봉토분이고 관이 놓이는 내부는 돌방이며 껴묻 거리를 넣기 위한 별실을 마련했다. 돌방의 덮개돌 주위 평지에는 연꽃·구름·12지신 상 等을 조각한 둘레돌을 두르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봉토를 만들었다. 太祖 李成桂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을 보면 봉분 주위에는 돌난간을 비롯하여 일정한 형식에 따라 시설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즉 돌난간 바깥에는 동쪽·서쪽·북쪽에 담장을 둘렀고 담장 안에 좌우로 4개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교대로 세웠으며 봉분 앞 중앙에는 석상을 놓았다. 석상 좌우에는 망주 석을 그 아래 단 가운데에 長明燈을 세웠고 2개의 문인석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1단 아래에 武人石이 위치하며 文人石과 武人石 뒤에는 석마(石馬) 1필씩이 서 있고 입구에서 봉분을 향해 오른쪽에는 비각을 세웠다. 경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全體的으로 이러한 施設物을 갖춘 구역이 능역(陵域)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관리를 위해 수호군(守護軍)과 보인(保人)이 설정되고 비용조달을 위해 수조지(收租地) 약간이 지급되었다. 그동안 文化財 保護를 위해 공개를 제한하였던 朝鮮王陵 숭릉(崇陵) 사릉(思陵) 강릉(康陵)이 全面 개방된다. 文化財廳이 이번에 개방하는 崇陵 思陵 康陵은 各各 丁字閣과 碑閣 등 문화재 보수정비를 끝내고 便宜施設을 설치하여 觀覽客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다. 숭릉(崇陵)은 京畿道 구리 동구릉의 아홉 王陵 中 하나로 玄宗과 明聖王后를 모신 능이다. 鳳林大君이 청나라에 있던 당시 태어난 玄宗은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하였다. 崇陵은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이다. 肅宗 즉위년(1674)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숙종 10년(1684)에 현종의 비 明聖王后의 陵을 王陵 옆에 나란히 조성하였다. 陵域 남쪽이 저습하여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부분이 地形的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比較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丁字閣까지의 거리가 比較的 멀고 丁字閣이 경사지 위에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도 우뚝한 모습이 돋보인다. 崇陵의 丁字閣(寶物 제1742호)은 朝鮮 王陵에서 볼 수 있는 단 하나뿐인 팔작지붕으로 다른 왕릉 丁字閣의 맞배지붕에 비해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릉(思陵)은 京畿道 남양주에 자리한 단종의 비 定順王后의 陵이다. 端宗이 首陽大君에게 王位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王后는 王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王后는 每日 산봉우리에 올라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은 지아비가 묻힌 영월(章陵)을 바라보며 그리움으로 세월을 보냈다 한다. 肅宗은 이러한 王后의 애절한 마음과 端宗을 향한 생각을 기리기 위해 능호를 思陵이라 붙였다. 무덤에는 屛風石과 난간 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端宗의 무덤이 章陵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屛風石과 난간 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王陵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長明燈은 章陵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있는 강릉(康陵)은 명종과 그의 비 仁順王后를 모신 쌍릉 형태의 무덤으로 1Km 거리를 두고 모후인 文定王后 윤씨의 泰陵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泰陵과 같은 屛風石이 둘러져 있으며 돌로 만든 장명등은 16세기 복고풍의 특색을 보여준다. 또한 강릉과 태릉의 배치에서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가 수렴청정을 하였던 당대 역사의 단면도 읽을 수 있다. 조선 왕릉의 관람 시간은 09시부터 오후 5시 30분(동절기) 또는 오후 6시 30분(하절기)까지이며 휴무일은 매주 월요일이다. 동구릉(관람료: 성인 1,000원/ 학생 무료)에 가면 숭릉을 비롯하여 아홉 王陵을 모두 볼 수 있고 내년에 시범 개방하는 思陵과 康陵은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이번 개방과 관련해 궁금한 사항은 조선 王陵관리소(02-739-7829) 동부지구관리소(동구릉․사릉 031-563-2909) 중부지구 관리소(강릉 02-972-0370)에 문의하면 된다. 아울러 文化財廳은 아직 개방하지 않은 온릉(溫陵 중종 비 端敬王后) 효릉(孝陵 인종 비 仁聖王后) 장릉(章陵 인조와 원비 仁烈王后)도 연차적으로 원형복원과 便宜施設 설치를 추진하여 向後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에 등재된 40기의 조선 王陵을 모두 공개할 계획이라 밝혔다. 仁烈王后는 孝宗의 어머니이며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아버지는 영돈녕 부사 준겸(浚謙)이다. 1610년(光海君 2) 능양군(綾陽君:뒤의 인조)과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해졌다. 1623년(인조 1) 仁祖反正으로 王妃에 冊封되었다. 1651년(孝宗 2)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徽號)가 추상되었다. 소생으로 孝宗·소현세자(昭顯世子)·인평대군(麟坪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을 두었다. 陵은 장릉(章陵)으로 처음 파주 운천리에 장사지냈으나 1731년(영조 7) 교하로 이장했다. 仁聖王后는 1514(중종 9)∼1577(선조 10) 조선 제12대왕 인종의 비 본관은 반남(潘南) 성은 박씨(朴氏)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용(墉)의 딸이다. 524년(중종 19) 세자빈에 책봉되고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존호는 공의(恭懿)·효순(孝順)이며 전호(殿號)는 효모(孝慕)이다. 슬하에 태생이 없으며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에 있습니다.

 

●. 國朝五禮儀 조선 초기 오례(五禮)를 규정한 예서(禮書).

 

▲. 8권 6책 목판본 오례는 국가의례를 말하는 것으로 중세사회에서 오례는 단순한 의례규범이 아니라 국가와 왕실 왕과 신하와의 관계 등을 규정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朝鮮에서 오례의는 法典編纂과 동시에 행해졌다. 조선 초기에 經濟六典을 편찬하면서 世宗 때에 오례의 편찬을 시도했다. 이 결과가 世宗實錄五禮儀이다. 世祖가 즉위한 후 이것이 불완전하다 하여 강희맹(姜希孟)·성임(成任) 등에게 명하여 經國大典과 함께 五禮儀注를 편찬하게 했다. 그러나 세조가 중도에 사망하여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성종 초반에 신숙주(申叔舟)를 책임자로 작업을 재개하여 1474년(성종 5)에 완성했다. 오례의 개찬과 작업 중단 재개과정은 세조의 王權强化 政策과 성종 초반 훈구파의 집권 등 정국변동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일례로 세조는 원구단(圓丘壇)을 부활했으나 國朝五禮儀에서는 이는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뺐다.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숙주(申淑舟)·강희맹(姜希孟)·정척(鄭陟)·이승소(李承召)·윤효손(尹孝孫)·박숙진(朴淑秦)·정영통(鄭永通)·이경동(李瓊仝)·유순(柳洵)·구달손(具達孫)·최숙경(崔淑卿)이다. 구성은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의 순이다. 이는 송사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송대 유학의 수용과 관련이 있다. 권1·2는 길례이다. 권1은 30조로 종묘·사직·산천 등에 대한 국가의 제사규정이다. 권2는 26조로 선농(先農)·선잠(先蠶)·기우(祈雨)·석전제(釋奠祭) 등을 수록했다. 주현포제의(州縣酺祭儀)·주현려제의(州縣祭儀)·구우주현영제성문의(久雨州縣榮祭城門)·제악해독의(祭嶽海瀆儀) 등 주현을 단위로 지방관이 시행하는 항목이 증설되고 기타 의례의 시행방안에서도 지방 단위의 시행을 강화했다. 이는 조선 초기 國歌統治體制의 强化政策과 관련이 깊다. 마지막의 士大夫서인사중월시향의(士大夫庶人四仲月時享儀)는 백성의 의례이다. 비록 한 조문이지만 서인의 의례까지 언급한 점이 특징적이다. 권3·4는 가례로서 대부분 왕실관계 의례이다. 권3은 21조로 정지(正至)·성절(聖節) 때 중국에 대한 망궐례(望闕禮) 等 사대관계 의례와 명절때의 조하(朝賀)·조참(朝參)·문무관관의(文武官冠儀)·납비의(納妃儀)·책비의(冊妃儀)等을 수록했다. 권4에는 왕세자의 책봉 왕실의 혼례 방방의(放榜儀) 等 과거관련의양로연의(養老宴儀) 그리고 각종 國內使臣과 외관들의 의례 향음주의(鄕飮酒儀) 등을 수록했다. 권5는 빈례 6조로 外國使臣을 접대하는 儀禮이다. 권6은 군례 7조로대열의(大閱儀)·강무의(講武儀) 等 軍事訓鍊과 관련한 내용이다. 출정의(出征儀) 等을 빼고 項目이 많지 않다. 권7·8은 凶禮로 各各 59조와 32조이다. 모두 국장과 왕실의 상제(喪制)와 관련된 내용이다. 백성의 의례는 대부사서인상의(大夫士庶人喪儀) 1조가 있다. 奎章閣·장서각 等에 소장되어 있다.

 

●. 2013년 01월 06일, 國家報勳處알림이 및 文化財지킴이 龍虎 宋 哲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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