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북문터 사적(史蹟) 제298호 남원읍성 (南原 邑城) /李啓錫
작성자
이계석
작성일
2013-12-14
조회수
1403

南原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였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해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南原  읍성은  돌축대의 길이는 2.4km가 넘고, 높이 약 4m에 이르며 성 안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 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너비가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구성을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며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 성내의 가로 구성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 반듯한 구성과 성내의 가로가 직선으로 구성된 점이 흥미롭다,

 

전문 설명

(南原) 남원성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신문왕(神文王)때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동왕(同王) 11년(691)에 쌓은 것이다. 사방에 문을 가진 평지의 읍성(邑城)으로서 정유재란(丁酉再亂)(1597)때에 격렬한 전투로 파괴되었다.

 조선(朝鮮) 숙종(肅宗) 18년(1692) 개축하였으나 고종(高宗) 31년(1894) 동학혁명(東學革命)때 많이 허물어져 지금은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 있다. 규모는 석축(石築)의 길이가 8천척(八天尺)이 넘고 높이가 13척에다 성안에는 70여개의 우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광한루와 오작교는 알아도 읍성은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하찮은 돌담정도로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400년전 이 성안에서는 왜군들이 쳐들어와 살육장을 만들었다. 1만 여명의 남원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는 단 하루 만에 산자와 죽은 자로 승패가 갈렸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남원성을 포위한 왜군의 병력은 5만 6000여명 최정예군 이었다. 남원성의 우리군1000명과 청나라 군 3000명에 1만 여의 백성들이 전부였다. 북문을 지켰던 방어사 오응정과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준이 수세에 밀리자 화약고에서 왜군을 안고 같이 자폭할 정도로 사기는 떨어졌다. 그리고 전투는 끝이 났다.
그 날 하루에 1만명이 죽었다. 성내 모든 건물들도 전소됐다. 싸움이 끝났는데도 왜군은 남원의 민초들까지 보이는 대로 살육했다. 심지어는 코와 귀를 잘라 본국으로 보냈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렇게 죽은 조선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합장했다. 그곳이 바로 현재 성 밖 둔덕마루에 있는 만인의총이다. 숨져가면서도 이 땅을 지켰던 옛 사람들, 그들의 강직한 절개가 새삼 가슴을 적신다.


기록에는 남원에서 온전하게 목숨을 보존한 사람은 도공들뿐이었다. 남원성 전투가 끝나고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의 도공만 70여 명이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그때 도자기 제조 기술을 익혔기 때문에 나온 말들이다.
남원성은 통일신라 때 소경(지방 행정도시)을 설치하면서 읍성을 축성했다. 그 후 조선 초기에 언양읍성과 함께 네모반듯한 성으로 새로 고쳤다. 둘레는 2.5km, 높이가 4m, 사방에 문을 두었다.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큰 규모의 성이다. 우리나라 읍성에서는 볼 수 없는 네모반듯한 축법과 성안에는 바둑판 같이 도로도 냈다. 
조선후기(1897)에 그려진 고지도 459장 중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 남원부지도는 아름다운 색상과 정교한 필체, 상세한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고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원에는 2개의 성곽이 존재하고 있다. 시내의 중심을 두른 남원성과 외곽을 둘러싼 교룡산성이다. 옛 고을에 성곽이 두 곳에나 축성됐다는 사실은 그곳이 싸움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은 현재도 여전히 과거의 잔영 속에 묻혀 있다. 그래서 남원의 역사는 지킴의 역사다. 쉴 새 없는 침략으로 성곽은 함락됐고 무너졌다.
근대화 개발에 밀려 성은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 전라선 철로가 놓이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성벽도 강제 철거됐다. 서쪽성벽 일부가 있었지만 최근 복원하면서 켜켜이 쌓인 고색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삼일  만세운동  거리였다고  한다,
남원성  사적  제298호  북문터  삼일  만세운동  비석들,
북문터  에는  동학  농민군의  주둔지였으나  독학혁명이  와에되면서  이곳에서   장열하계  싸우다가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함성은 지리산 자락에서도 메아리쳤다. 특히 2차 농민전쟁이 전개되던 1894년 8월 25일 부터 11월까지가 그러하였다. 전봉준이 정부쪽과 타협하여 점점 농민군의 지지를 잃어갈 무렵, 농민전쟁 2대  지도자인 김개남(1853~1894)은 8월 25일 지리산 자락을 등지고 있는 전라도 남원에서 대대적인 농민군집회를 열고 본격적인 무력투쟁을 선언하였다. 남원에 모인 농민군은 5만명이 넘을 정도로 그 열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김개남은 남원성과 교룡산성을 무력투쟁의 거점으로 삼은 뒤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남원성은 둘레 8,199척의 크기로 1597년에 새로 축성되었을지라도 네모 반듯한 형태로 완연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며 동서남북으로 교차된 직선도로가 네 성문과 통하고 있었다(사적 제298호). 교룡산성은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518m)의 정상에 쌓여진 3,120m의 포곡식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이래 남원지역을 지키는 군사요새지였다(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 그곳에 오르면 남원 일대와 지리산 자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같은 지역을 거점으로 확보한 김개남부대는 남원성을 군 사령부로 사용하고 교룡산성을 증축하여 남원의 외곽을 튼튼히 방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산의 화적들을 끌어들여 군사력을 증강하고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신분제의 질곡에 신음하던 하층 천민을 농민군 최정예부대로 편성하였다. 그들은 사납고 용감하였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리산 화엄사를 군수미 창고로 활용하였다. 그는 남원의 산동방(지금의 구례군 산동면)과 구례에서 군수미로 1결당 7두씩을 거두어 들여 3백섬을 화엄사에 쌓아두도록 하였다. 당시 절집은 농민군 아지트 역할을 하였다. 승려들도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봉건체제의 수탈과 압제를 받고 있어 같은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에는 승려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김개남이 남원에서 무력을 강화하고 있을 무렵, 6월부터 지리산 남쪽에 위치한 순천·광양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영호도회소의 총대장 김인배는 김개남의 뜻에 따라 9월 1일부터 본격적인 무력전쟁에 들어갔다. 그는 6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공격하였다. 진주를 거쳐 부산에 있는 일본인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하동을 점령한 김인배부대는 일부 농민군을 지리산 화개동으로 파견하였다. 그곳에는 농민들을 수탈하고 농민군에 적대적인 행위를 한 부호들이 살고 있었다. 농민군은 화개동 부호들의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압수하였다.

그 무렵 지리산이 올려다 보이는 경상도지역에서도 농민군이 들고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진주 지역은 1894년 농민전쟁기에 경상도에서 벌어진 최고의 격전지로써, 지리산 아래에 위치한 덕산을 비롯해 삼장·시천·사월·청암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그래서 서부경남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제거하려면 진주의 농민군을 소탕해야 되고 진주를 토벌하려면 이들 지역에 사는 농민군을 토벌해야 된다고 할 정도였다.

 

이곳은 이미 1893년 3월 보은집회 때부터 백도홍을 중심으로 한 동학도들이 크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백도홍은 1894년 4월 중순경에 붙잡혀 효수되었다. 그래서 다소 진정되는 기미가 있었으나, 7,8월에 들어와 또다시 동학농민군이 활동을 재개하였다. 7월 중순에는 남원 농민군이 단성현 단계리 일대로 넘어왔고, 8월 2일경에는 산청에서 봉민봉기가 일어났다. 9월에 들어와서는 진주 지역 동학농민군이 섬진강을 건너온 김인배부대와 합세 하여 진주일대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한편 남원에 머물러 있던 김개남부대는 10월 14일, 드디어 북상 길에 올라 서울 공격에 들어갔다. 이때 김개남부대는 무장한 농민군만 8천여 명에 이르렀다. 김개남부대가 서울로 떠나던 무렵 진주 수곡장터에는 진주·곤양·하동·남해·사천·단성의 농민군들이 진주 백목리에 모인 뒤 단성을 거쳐 집결해 있었다. 그 수가 무려 5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수곡장터에서 일차로 일본군과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수곡촌에서 패한 농민군은 다시 고승산성으로 퇴거하여 일본군과 최후의 일전을 치루었다. 이때 일본군이 직접 수거한 농민군의 시체만 하더라도 186구나 되었고 주변에 버려진 것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김개남이 떠난 남원에는 후방 방어와 경상도로의 진출을 위해 일부 부대가 남아 있었다. 이들은 11월 13일 운봉을 넘어 경상도로 진출하고자 남원 산동방 부동마을[가마골]에 진을 쳤다. 그리고 임정연이 이끄는 구례의 농민군은 남원 농민군과 합류하기 위해 구례 광의면 연파리에 모여 지리산 다름재를 넘었다.

 

다름재는 지리산 자락 만복대 아래에 있는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월계마을과 그 북쪽에 있는 남원군 운봉면 고기리로 통하는 고개였었다. 그러나 구례 농민군은 남원 농민군과 합류하지 못하였다. 구례 농민군이 다름재를 넘으려 할 무렵, 이미 남원 농민군은 남원에서 운봉으로 통하는 여원치와 관음재에서 박봉양이 주도하는 운봉의 민보군과 수차에 걸친 전투를 벌여 패한 뒤였다.

 

11월 중순경에 있었던 남원 농민군의 패배를 끝으로 지리산 주변에서 벌어진 농민전쟁은 내리막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1월 하순에 들어와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린 농민군의 불꽃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새 날을 기약하며 서울로 떠난 김개남도 11월 13일 충북 청주전투에서 패한 뒤 후퇴를 거듭 하다 결국 12월 1일 전북 태인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하였고, 11월 9일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전봉준도 12월 2일 전북 순창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갑오년 남해 바다를 주름잡던 김인배은 섬진강에 3천여 명의 동지를 묻은 뒤 12월 7일 전남 광양에서 체포되어 목이 잘리었다.  그의 목은 전시용으로 광양 객사 앞에 내걸리기까지 하였다.

운봉웁과  경계인  주천면의  여원재  에서  김계남이  이끈  동학농민근과  경상도로  진격하기  위하여  아침  5시부터  출발하여  여원재  에서  용성군과  전투가  시작되어  다음날  까지  장장  2틀이  걸리면서  농민군이   사상자만  3000여명의  달하자   후튀하여  남원성으로   후튀하였다고  하면서   이곳에서  매복이된  박봉양장군이  용성군을  매복하고  경상도에서   지원한  수성군의  매복의  걸려   동학농민군이  사상자만   30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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