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종대왕능#1
작성자
염우섭
작성일
2007-04-13
조회수
5907

세종대왕릉

영릉(세종,효종)으로 가는 입구 표지석 
릉으로 소풍가며 즐거워하는 애기들
영릉(英陵:세종대왕능)입구 전경 [사적 195호]
세종 대왕 영정(김기창화백 작)
 세종대왕 [世宗大王, 1397.4.10~1450.2.17]  
조선 제4대 왕.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뒤 정치, 경제·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1443년 한글을 창제하게 하고,1446년 이를 반포하였다.휘(諱) 도(祹). 자 원정(元正). 시호 장헌(莊憲).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민씨(閔氏) 소생이며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였고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군,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뒤 정치·경제·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등의 청백리(淸白吏)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의정부(議政府)를 견제했다. 또한 이를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卞季良),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궁내에 정음청(正音廳)을 설치, 성삼문,신숙주,최항등으로 하여금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하게 하고, 1446년 이를 반포하였다. 또한 이천(李蕆 )에게 명하여 경인자(庚寅字),갑인자(甲寅字),병진자(丙辰字)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
 
 
초기에는 억불책(抑佛策)을 써서 5교(五敎) 양종(兩宗:천태종,조계종)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經行)을 금지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승과제도(僧科制度),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그리고 음악(音樂)에도 관심을 기울여 1425년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고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또한 실록(實錄)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春秋館),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에 4대 사고(史庫)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과학기술 업적은 1442년 이천 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우량(雨量)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게 했고, 혼천의(渾天儀),해시계,물시계등의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등을 시켜 중국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 명(明)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을 빌어 역서(曆書)《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했다. 또한 천문 역법(曆法),의상(儀象)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이순지가 펴냈다.
 
 
경제,사회 정책면은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각도(各道)의 토지를 비척(肥瘠)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稅率)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함이 많아 14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풍흉(豊凶)에 따라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과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에 의한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量案)을 작성하게 했다.그리고 의창(義倉),의료제도,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제정했고, 노비(奴婢)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 사형(私刑)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處女進獻)을 폐지하는 한편, 명나라에 보내던 금(金)·은(銀)의 조공물(朝貢物)을 폐지하고 마(馬),포(布)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女眞)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六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1432).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崔潤德).이천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사민 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노력하였다.그리고 일본과는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14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卞孝文)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歲遣船)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歲賜米)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受圖書人)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垈里)에 있는 영릉(英陵)인데 처음에는 광주(廣州)에 있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
입구 세종대왕 동상
입구 연못의 석조
재실(齋室)입구
재실(齋室)은 홍살문 밖,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건축하여 제관(祭官)이 머물며 제사를 준비하던 집이다.왕의 국상(國喪)후 탈상(脫喪)때까지 대군(大君)등 자손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매년 제사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제사를 준비하던 집이다.
재실 정문
재실의 내부의 바같채(사랑채)
제실 안채
박물관 전경
훈민정음 (訓民正音) [국보 제70호]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여 있는 훈민정음의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박물관내 북(악기)#1
어(敔)
타악기로서 음악을 그칠때 사용한다.대나무채로 호랑이 목덜미를 세번친 다음 등위의 27개 톱니를 세차례 긁어 내려 신호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국보  제228호]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이 각석은 직육면체의 돌에 천체의 형상을 새겨 놓은 것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천문학자들에게 명을 내려 만들도록 한 것이다.(사진:모조품)
 
고구려의 천문도를 표본으로 삼아 그 오차를 고쳐 완성하였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내용을 배치하고 있다. 윗부분에는 짧은 설명과 함께 별자리그림이 새겨져 있고, 아래부분에는 천문도의 이름, 작성 배경과 과정, 만든 사람의 이름 및 만든 때가 적혀 있다.
 
별자리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나타내었다. 또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한 후 1,464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해, 달, 5행성(수성, 금성, 토성, 화성, 목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도 있다.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이 석각천문도는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지금은 표면이 심하게 깎여나가서 알아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고구려 천문도의 원형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혼상 [渾象]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 그대로 둥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기를 말하며 별이 뜨고 지는것,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다. 혼상을 하루에 한번씩 회전시켜 보면, 별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고,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도 측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BC 70~BC 50년에 이미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개량하였다.
한국에서는 1437년(세종 19)에 제작된 것이 기록으로는 최초이다. 이것은 지름 71.6cm인 구(毬)에 칠포를 입혀서 만들었다. 그 후 세조 때 만든 것은 오랫동안 잘 사용되었으나 기계부분에 고장이 생겨서 1526년에 수리하여 내관상감(內觀象監)에 보관되면서 두번째 혼상이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타 버렸다. 세번째는 1601년(선조 34)에 이항복(李恒福)의 감독하에 제작되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한국에 있는 혼상은 2개인데, 하나는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의 소장품으로서 형태만 겨우 남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름 68.6cm로 경북 경주시 민속공예촌의 신라역사과학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의 [簡儀] 
조선시대 천문대에 설치되었던 중요한 천문관측기기들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각도기(角度器)와 비슷한 구조를 가졌으며 혼천의를 간소화한 것이다.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渾天儀: 천문시계)와 함께 조선의 천문대에 설치한 가장 중요한 관측기기로, 오늘날의 각도기(角度器)와 비슷한 구조를 가졌으며, 혼천의를 간소화한 것이다. 1437년(세종 19)에 완성된 간의제도는《원사(元史)》에 나타난 곽수경법(郭守敬法)에 의하여 대간의와 소간의를 만들었는데, 소간의는 대간의를 휴대용으로 축소해서 정동(精銅)으로 다리[趺]를 만들고, 그 둘레에 수거(水渠: 일종의 도랑)를 파서 자오(子午)에 준하여 수평을 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적도환(赤道環)은 주천(周天: 공전)을 365도 1/4로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면서 칠정(七政: 일 월과 수 화 금 목 토의 5행성) 중 외관입수(外官入宿)의 도분(度分)을 재며, 12시(時) 100각(刻)으로 나눈 백각환(百刻環)은 적도환 안에 있는데, 그것으로 일구(日晷: 시각)를 알고, 밤에는 중성(中星: 해가 질 때와 돋을 때 하늘 정남쪽에 보이는 별)을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1432년(세종 14) 장영실(蔣英實) 등은 목제간의를 만들었으며 1438년에는 구리로 대 ·소 간의를 만들어, 대간의는 경회루 북쪽에 있는 간의대에 설치하고, 소간의는 휴대용으로 사용하였다. 간의는 조선의 천문학에서 적도(赤道)에 관한 위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만든 것으로, 혼천의의 육합의(六合儀) 삼진의(三辰儀) 사유의(四游儀) 중에서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만을 따로 떼어서간소화한 것이다.
소간의(小簡儀)
소간의(小簡儀)는 조선시대의 천체 위치를 측정하는 관측기기이다. 세종대(世宗代) 소간의는 간의와 함께 천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 측정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간의를 간소화하여 이동이 편리하도록 제작하였다.소간의에 대한 기록으로는 세종 19년(1437년) 4월 15일(갑술일)의 정초의 <소간의명(小簡儀銘)>에 대한 내용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는데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재위 16년인 1434년 가을에 이천(李 ), 정초(鄭招), 정인지(鄭麟趾)로 하여금 소간의를 제작하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한 개의 소간의를 설치하였고 다른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문헌비고》의 기록에 의하면 1494년인 성종 25년에 영의정 이극배(李克培)로 하여금 소간의를 만들게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세종(世宗) 재위 당시에 2개의 소간의가 만들어 졌고 성종대(成宗代)에 1개가 만들어졌다. 소간의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처럼 군대에 보내져서 사용한 기록은 없지만 그 간소함으로 인하여 군대 뿐 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천체 관측을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천평일구 [天平日晷]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휴대용 해시계로 시표와 시반이 수직을 이루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지남침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도록 하였다.해시계의 제작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세종실록》에 처음 나타난다. 천평일구는 1437년(세종 19) 4월에 정초(鄭招) 장영실(蔣英實) 김빈(金?) 이천(李蕆) 김돈(金墩)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 밖에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규표(圭表) 등 일련의 천문의기(天文儀器)가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해시계들은 중국 원대(元代)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천문의기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천평일구는 시표(時標)와 시반(時盤)이 수직을 이루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十字)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지남침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細線)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주일구와는 현주장치(懸珠裝置)를 빼고 수평을 잡기 위한 원지(圓池)를 하나 더 두었다는 점이 다르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주일구 [懸珠日晷] 
조선시대에 만든 휴대용 해시계로 1437년 세종 19년 4월에 정초·장영실·김빈·이천·김돈 등이 만들었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세종대왕릉. 세종 19년에 창제한 해시계 중의 하나이다.
해시계 제작에 대한 최초의 공식기록인 《세종실록》에 의하면, 현주일구는
1437년(세종 19) 4월에 정초(鄭招)·장영실(蔣英實)·김빈(金??)·이천(李?)김돈(金墩)등이 만든 것으로, 중국 원대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영향과 전통을 이은 것이다. 시표(時標)와 시반(時盤)이 수직이 되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十字)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자침(磁針)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細線)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게 하였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으로 보인다. 
앙부일구(仰釜日晷) [보물 제845호]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전시된 2개의 해시계는 작고 오목한 가마솥 모양에 네발이 있는 우아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작풍과 제작기법이 같다.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고 글자와 선을 은상감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한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유물이다.
규표[圭表]
전근대사회에서 사용한 천문관측기구의 하나로서 동지점(冬至點)을 관측하기 위해 옛날부터 땅에 수직막대를 세우고 그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방법을 써왔다. 이 수직막대를 표(表) 또는 비, 얼이라 불렀다. 그리고 표 아래 끝에 붙여서 수평으로 북쪽을 향하여 누인 자를 규(圭)라 한다. 이슬람에서는 노몬(gnomon)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이미 은대(殷代)에 쓰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주비산경 周算經〉에는 주대(周代)에 규표를 사용한 실례가 많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규표는 중국 장쑤 성[江蘇省]의 후한(後漢)시대의 묘에서 출토된 동규표(銅圭表)이다. 그리고〈주비산경〉에 따르면 고대에는 표의 높이가 주척으로 8척이었다고 한다. 원나라 곽수경(郭守敬)은 허난성[河南省] 덩펑[登封]에 높이 4장(丈)의 비석과 같은 구조의 규표와 이에 붙는 경부(景符)를 고안해서 태양으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를 분명하게 했다. 경부는 표의 끝을 지나는 햇빛이 규면 위에 떨어뜨리는 그림자가 흐릿하게 번져서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규면 위에 비스듬히 태양광선에 직각으로 작은 구멍이 뚫린 동판을 댄 장치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이 8척의 규표를 이용하여 1년의 길이가 365.25일임을 알아냈다. 또 유송(劉宋)의 조충지(祖沖之)는 규표에 의해 동지 일시를 측정하는 방법을 발견해냈다. 규는 정오 때 생기는 표의 그림자를 정밀히 측정하여 정확한 절기와 1년의 길이를 정할 수 있으며, 방향이나 시간은 물론 어느 지점의 위도도 측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에 의하면 조선 세종 때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簡儀臺)를 쌓고 그 서쪽에 동표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8척의 5배 , 즉 40척으로 곽수경의 동표와 같았다. 또 청석(靑石)을 깎아서 규를 만들고 규면에 장(丈)·척(尺)·촌(寸)·푼[分]의 눈금을 새겼으며 곽수경이 발명한 경부를 써서 태양의 그림자를 측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없어지고 말았다.
옆면에서 바라본 해시계
해시계 [sundial] [보물 제845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내에 있는 이 해시계는 지구의 자전에 의하여 물체의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으로부터 시간의 경과를 측정하는 장치을 말한다. 그림자를 어떻게 투영하는가에 따라 팽이형,반원통형,수평형,수직형등으로 구별된다.
 
초기에는 수직으로 세운 막대나 기둥이 지면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이동을 살
펴서 시각을 측정했다. 구약성서 《열왕기하》 20:10∼11에 나오는 일구(日晷)도 해시계이며, 또 고대 이집트의 신전(神殿)의 입구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도 같은 구실을 하였다. 이들의 원형은 그노몬(gnomon)으로, BC 6세기의 아낙시만드로스가 발명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폴로스라고 하는 해시계가 있었는데, 이것은 연직(鉛直)으로 세운 막대 바로 아래에 막대길이와 같은 반지름의 반구(半球)를 놓아 만든 것으로, 반구 안쪽에 새긴 가로·세로의 눈금으로 막대의 그림자를 재도록 되어 있었다.
 
 
이집트는 해시계를 BC 10세기∼BC 8세기부터 만들었는데, 연직막대 밑에 눈금용 돌을 놓은 형태로 된 것들이었다. 눈금은 균일하게 새긴 것이 아니고, 계절에 따라 1시간의 크기가 변하는 방식이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해시계는 그노몬식의 기둥을 수직으로 세워 그 그림자를 보는 형식의 것은 많지 않으며, 지구의 자전축(自轉軸)과 평행한 막대, 또는 판의 가장자리 선의 그림자를 보는 형식의 것들이 많다.
 
 
그림자를 어떻게 투영하는가에 따라 팽이형·반원통형·수평형·수직형 등으로 구별된다. 팽이형 해시계는 북극(北極)을 향한 막대의 중간에 원판을 꿰뚫어놓고 그 원판 상에 막대와의 교점을 중심으로 15°씩 눈금을 매겨 막대의 그림자가 원판의 1눈금을 경과할 때를 1시간으로 읽는 것이다. 반원통형 해시계는 원통을 반으로 자른 것을 북극을 향해서 놓아, 단면의 중심에 막대를 원통의 외벽과 평행으로 놓고, 그 막대의 그늘을 원통 내부에 새겨진 눈금으로 읽는 것이다.수평형 해시계는 한 각을 그 지역의 위도와 같게 자른 삼각형의 상단을 북극을 향하게 하고, 수평의 원판 위에 고정하여 삼각판의 윗가장자리 그림자를 원판상에서 읽게 한 것으로 시각눈금도 계산 또는 작도(作圖)에 의하여 만든다. 이 형은 정원(庭園) 등에 놓는 장식을 겸하여 만든다. 수직형은 건물의 남쪽 벽에 만드는 일이 많고, 1변이 북극을 향한 삼각판의 그림자에 의해 건물의 벽면에 새겨진 눈금으로 시각을 읽는다.이러한 해시계에 의하여 얻어진 시각은 진태양시(眞太陽時)이므로, 보통 사용되는 평균태양시(平均太陽時)로 고치는 데는 그 값에 균시차(均時差)를 가감해야 한다. 
 혼천의(渾天儀)[국보 제230호]
서울 성북구 안암동 1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있는 조선 현종 10년(1669) 천문학 교수였던 송이영이 만든 천문(天文)시계로, 홍문관에 설치하여 시간 측정과 천문학 교습용으로 쓰였던 것이라 한다.
 
시계의 지름은 40㎝이고, 그 중심에 위치한 지구의(地球儀)의 지름은 약 8.9㎝이다.2개의 추 운동에 의하여 움직이는데, 하나는 시각을 위한 바퀴와 톱니바퀴들을 회전시키고, 다른 하나는 종을 치는 장치를 위한 것으로, 여러 개의 쇠 구슬이 홈통 안을 굴러 내려감으로써 종을 치는 망치가 걸려 곧 종이 울리고, 회전바퀴 살에 붙은 주걱들에 의하여 쇠 구슬이 들리면서 이 작동이 반복된다.즉, 2개의 축을 동력으로 하여 여러 가지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시계 장치와 지구의가 설치된 혼천의 두 부분이 연결되어 있어 시간과 천체의 위치를 동시에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만든 천문시계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모델이었던 물레바퀴의 원리를 동력으로 삼은 시계장치와 서양식 기계 시계인 자명종의 원리를 조화시켜 전혀 새로운 천문시계 모델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세계 시계 제작기술의 역사상 독창적인 천문시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만원짜리 지폐뒷면 그림
관천대 (觀天臺)[보물 제851호]
진품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창경궁내에 있으며 서울에는 현재 조선시대에 만든 2개의 관천대가 있다하나는 창경궁 안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전 휘문고등학교 교지에 있는 것인데, 두 관천대는 구조나 크기, 제작 방법이 거의 같다.창경궁 안에 있는 이 천문 관측소는 『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조선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졌다.높이 3m, 가로 2.9,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石臺) 위에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관측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한다.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였다.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며, 관상감에 세워졌던 조선 초기의 또 하나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적도의[赤道儀]
적도환(赤道環)은 주천(周天: 공전)을 365도 1/4로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면서 칠정(七政: 일 ·월과 수 ·화 ·금 ·목 ·토의 5행성) 중 외관입수(外官入宿)의 도분(度分)을 재며, 12시(時) 100각(刻)으로 나눈 백각환(百刻環)은 적도환 안에 있는데, 그것으로 일구(日晷:시각)를 알고, 밤에는 중성(中星: 해가 질 때와 돋을 때 하늘 정남쪽에 보이는 별)을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1432년(세종 14) 장영실(蔣英實) 등은 목제간의를 만들었으며 1438년에는 구리로 대 ·소 간의를 만들어, 대간의는 경회루 북쪽에 있는 간의대에 설치하고, 소간의는 휴대용으로 사용하였다. 간의는 조선의 천문학에서 적도(赤道)에 관한 위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만든 것으로, 혼천의의 육합(六合儀) ·삼진의(三辰儀) ·사유의(四游儀) 중에서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만을 따로 떼어서 간소화한 것이다.  
측우기 [測雨器] [보물 제561호]
1441년(세종 23) 8월에 호조(戶曹)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道)의 군현(郡縣)에 설치하였다. 원래 측우기가 쓰이기 이전에는 각 지방의 강우량의 분포를 알아내는 데 매우 불편하였다. 즉, 비가 내림으로써 흙속 깊이 몇 인치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일일이 조사해 보아야 하는데, 이때 흙에는 마르고 젖음이 같지 않아 강우량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측우기는 일정기간 동안 그속에 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곳의 강우량으로 하기로 되어 있다.측우기는 안지름이 주척(周尺)으로 7인치(14.7cm),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 이 원통을 집밖에 세워 두면 빗물을 받을 수가 있다.
 
 
측우기에 괸 물의 깊이는 자[尺]로 측정한다. 즉, 대(臺)를 관상감에 만들어서 측우기를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도록 하는데, 관상감의 관원이 직접 주척으로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보고한다. 중앙에는 관상감에, 지방에는 각 도의 감영(監營)에 설치하였다. 처음에 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자기(瓷器)·와기(瓦器) 등을 쓰기도 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하였으며, 이것은 이탈리아보다도 약 200년이 빠르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야외에 설치된 측우기(모조품)
수표 [水標](물높이 즉정하는 돌기둥)  
세종대왕 기념관내에 잇으며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3m, 나비 약 20cm의 화강암으로 된 부정 6면 방추형 돌기둥이다.
1441년(세종 23)에 청계천(淸溪川)의 수위를 재기 위하여 마전교(馬前橋) 서쪽에 세웠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다가 나중에(세종∼성종 연간) 돌로 바꾸었는데 이 수표의 표신(表身)은 1773년(영조 49)이나 1833년(순조 33)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석(臺石)과 개석(蓋石)은 그 전에 만들어진 것 같고, 눈금은 양면에 1자[尺]부터 10자까지 1자마다 새겨져 있다. 또 3자·6자·9자의 선 위에 0표를 하여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를 알려주었다.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했다가 1973년에 다시 현재의 장소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 안으로 옮겨 놓았다.
보루각자격루 (報漏閣自擊漏)[국보 제229호] 
서울 중구 정동 5-1의 궁중유물전시관내에 있는 물시계로서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이 쇠 구슬은 다른 쇠 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 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도기로 된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창경궁 명전전 뒤에 2개가 남아있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있는 명나라의 물시계 보다 조금 늦게 만든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풍기대 [風旗臺] 
조선시대에 풍향을 관측하기 위해 설치한 받침돌이다.
여기에 풍기죽(風旗竹)을 꽂고, 24방향으로 풍향을 측정하였는데, 1770년(영
조 46)에 만든 풍기대가 창경궁(昌慶宮)과 경복궁(景福宮)에 각각 남아 있다. 
선생님의 열정적인 문화유산 설명과
애기 들의 관심 어린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2007년 4월 10일[화요일]
진주성지킴이회 회장 염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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