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국립고궁박물관
작성자
류승택
작성일
2011-02-20
조회수
1398

국립고궁박물관 이란?

1908년 9월에 황실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92년 10월에는 4대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 석조전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궁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 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혔고 이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광복 60주년인 2005년 8월 15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경복궁 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이전 개관하였다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 답사...

처음엔 들어간 나는 매우 뻘쭘했다. 준규가 교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온 것이 더욱더 뻘쭘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평일이라 사람이 얼마 없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2층으로 경복궁역에서 경복궁 방면 출구로 나오면 그곳이 바로 국립고궁박물관 2층이다.

처음은 제왕기록실이었다. 이곳 입구엔 조선 역대 왕실의 족보가 있었다. 그리고 태조임금 금보, 금니로 글씨를 쓴 옥책, 정조임금의 옥쇄, 죽책, 그리고 세종임금이나, 비가 직접 쓰진 않은 세종임금 금쇄, 세종비 금쇄가 있었다. 둘 다 돌아가신 후 시호를 세기며 만든 도장이었다. 그리고 명성황후 옥보, 광무황제 첫째아들 완화군을 완친왕으로 추봉하는 도장, 약간 검은 색이 묻어있는 문종세자빈 금인이 있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모작으로만 보던 이성계의 초상이 여기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도 너무 낣아서 1827년 다시그린거라고 한다. 그 반대면에는 왕의 옥좌와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양 옆을 장식하는 장식용 꽃이 있었다. 그리고 정조임금 옥함, 광무황제 옥보함이 있었다. 일월오봉도에 대하여 아는것을 한번 말해보면 큰 연회같은 행사가 있을땐 꼭 그림을 그려 보관했는데, 이때 임금이 참석한 행사가 많았다. 그때마다 화원들은 임금을 그리지 않고 대신에 임금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를 그렸다고 한다. 다음은 임금의 의자를 재현해 놓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임금의 자리를 보니 매우 불편하게 생겼었다. 사극에서 보면 왕들이 비스듬하게 앉더니 그 이유가 이것때문인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다음은 왕실의 각종 의궤에 관한 것 이었다. 최근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되었다. 그만큼 조선왕실의궤뿐 아니라 다른 의궤를 보는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엔 1830년에 창경궁이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을때 사용되던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임금초상화제작의궤가 있었다. 각종 별별 이름의 의궤가 있었다. 그리고 궁중잔치를 목판에 새긴 것도 있었는데, 이색적이라 흥미로웠다.

다음은 수많은 도장들이 있었다. 각각부서, 관직마다 모두 도장이 달랐는데, 종류가 수많았다. 특이했던건 궁궐순찰하는 군사들이 쓰는 도장이었는데, 몽둥이 같은 모양의 끝에 도장이 파져있었다. 무기임과 동시에 도장의 기능까지 갖춘 1석 2조의 기능이었다.

다음은 국가의례실이었다. 이곳에선 수많은 제기와 제사음식들이 있었다. 흥미로운건 제사음식표기를 한글로 해놓았다는 것이다. 간장, 초장, 목면 등등 읽을수 있었다. 궁녀들이 한자를 알기엔 힘들기에 한글로 표기한 듯 싶다. 그리고 금색실로 수놓은 제기병풍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세자의 성인식 그림등이 있었다.

다음은 궁궐건축이었다. 그곳엔 용그림부적이 있었는데 기능은 화재를 막아주는 기능이란다. 그리고 물水를 세긴 은판도 있었는데 그것역시 화재를 막는 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화재를 막아주는 용가 水자의 조합인 그림이 있었다. 온통 龍자로 水를 만든 종이도 있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참여의지를 밝힌 글도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 교태전 설계도도 있었는데, 한글로 적혀있었다. 건축가들도 한글을 몰라서 그런것 같다. 그리고 돌난간으로 추정되는 동물상도 있었다. 그리고 매우 화려한 것이 있었는데, 어좌보개장식이었다. 용무늬와 봉황무늬가 있었는데, 그러한 화려함은 왕만이 누릴 수 있는 것 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경회루에서 출토된 청동용이 있었다. 이것은 옛 경회루 전도에 있었던 것 이라고 한다. 그런데 왕실의 중엄함에 맞지않게 용이 혀를 내밀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각종 청기와와 처마에 쓰인 각종 어처구니가 있었는데, 삼장법사가 있어서 놀라고 흥미로웠다.

다음은 과학기술이었다. 해시계에는 구형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평명해시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지구의 동의보감 등이 있었다. 그리고 삼인검, 사인참사검 등을 보고 그것이 무슨 뜻 인지 알게 되었고, 임금의 칼, 은입사 쇠몽둥이 등을 보았다. 이때 준규가 한 소리 했는데, 쇠몽둥이에 왜 은, 금을 입혔는지 쓸데 없다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하지만 손상흔적이 없는걸 보니 직접 때리지는 않은 것 같다. 표면에 화려한 은입사가 있는 것을 보니 장식용이란 것을 알고 알려주었다. 뭐 그래도 확실히는 알 수 없으니...

다음은 조상들의 천문수준을 알 수 있는 곳 이었다. 곳곳에 천문도가 그려져 있고 천문도가 돌에도 세겨져 있었다. 새로 알게된 것은 조선 태조때 만든 천문도가 고구려 1세기의 석각천문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조선 태조때와 고구려는 시기상으로 120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조선이 고구려의 천문도를 기반으로 하였다는 것은 고구려의 천문기술의 우수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고구려의 석각천문도는 전란과 멸망속에 대동강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아쉬운 노릇이다. 그 외에 숙종때 다시세긴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있었다.

다음은 왕실생활이었다. 이곳엔 각종 은주전자, 비녀, 벼루, 옥잔, 청자잔, 은잔이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한글이 써진 청자접시였다. 그런데 읽어봐도 무슨소린지 모르겠었다. 다음은 왕비가 혼례를 치룰때 입는 의례복에 관한 전시였다. 딱봐도 매우 많은 것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옥비녀, 떨비녀, 난초비녀, 용비녀 비녀만 해도 4가지 였다. 머리가 매우 무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왕과 왕비의 의례복을 펴 전시한 것이 있었는데, 왠지 새것같다 했더니 영친왕께서 입으셨던 것이란다. 100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변치않는 것을 보니 새삼 감회가 남다르다. 세상은 이리도 변했는데, 저 옷만은 변하지 않다니. 황실은 없는데 저 의복만 덩그러니 있다니... 참... 그 외에 영친왕의 곤룡포, 세자때 입었던 옷 등이 있었다. 난 이를 뒤로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대표인 오얏꽃 문양 어차가 있었다. 이 차는 전 세계에 30여대 밖에 남지않은 차로 희소성이높다고 한다. 반짝반짝하니 멋있었다. 그 차를 뒤로하고 탄생교육관으로 들어갔다. 이곳엔 왕가의 탄생문화에 대해 전시하고있었다. 왕손이 태어나면 탯줄과 태반을 태항아리에 넣어 릉을 만드는 것과 이곳을 지키는 관찰사가 관리를 소홀히하면 처벌받는다는 것 등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왕실문예실이었다. 이곳에서 특이한 것을 보았다. 영조임금이 자신의 시력을 시험하려고 쓴 글이었다. 글씨를 보면 영조임금이 명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명필이 나온다는 것이 인상깊었고, 여러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살피니 영조임금의 손때가 묻거나 업적이 담긴 것들이 매우 많았다. 이를 계기로 영조임금이 얼마나 대단했던 임금이었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대한제국실이었다. 내가 매우 관심있는 근대사의 유물이다. 제일먼저 보인 것은 화려한 식기세트같은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식기마다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문양이 세겨져있어 대한제국 황실이 쓰던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황실의 단체그림등이 있었고, 관심이 매우 많았던 근대의 관복제를 알수 있었다. 그중 영친왕이 어릴때 입었다던 복식이 있었다. 그 혼돈의 시기에 어린 영친왕이 그 무었을 할 수 있었을까? 무너져가는 황실을 위해 그가 과연 무었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라가 해방된 뒤의 조국에서의 권력의 이해관계에 얽혀 자신의 나라에 오지못한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헌법에도 명시되있는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내용은 조선을 계승했다는 명목을 위한 구실뿐인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다음은 근대 쓰이던 지폐의 원판, 황성신문, 그리고 외국인이 개화기의 우리나라를 돌아다니며 쓴 기행문형식의 책; 조셉의 한국역사, 버튼홈즈의 기행기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근대식 제도의 일환인 대한제국 여권이 있었다. 다음은 각종 기념옥책, 기념장등이 있었다. 그리고 순종가례기념장, 순종즉위 기념장, 영친왕 세자책봉금장, 고종즉위 40년 기념장, 금보가 있었다. 보면 볼수롤 기울어가는 조국에서 이러한 기념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순간 광무, 융희황제 광무황제가 무능하게 보였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절 암울한 융희황제의 즉위가 무슨소용이고, 영친왕의 세자책봉이 무슨소용인가? 광무황제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얼마나 물밑노력을 한 것을 알고 있었던 나도 순간 그렇게 보였다. 이것만을 보면 왠지 근대의 의례식이 기울어가는 왕국의 운명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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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하1층 궁중회화실이었다. 이곳에선 일상적인, 평범한 병풍을 비교적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병풍들을 하나하나 보며 발이 없는 병풍을 보며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중 인상 깊은것은 일월오악도였다. 일월오악도는 궁궐마다 있으니 무었이 특별할까?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의 일월오악도는 병풍형식이 아니라 나무틀에 고정한 채 쓰는 일월오악도였다. 상하가 길어 산이 넓게 표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화려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외 궁중의례병풍, 화조도병풍 등이 있었다.

다음은 궁중음악실이었다. 이곳에서 음악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전통악기들을 볼 수 있었다. 제례악에 쓰이는 편경, 편종, 특종, 특경 등이 있었고, 조선 성종때 편찬한 음악서인 악학궤범도 있었다. 그리고 취타와 당악에 사용된 운라, 금.은.철을 입힌 대금, 나각, 태평소, 나각,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축, 노래의 끝을 알리는 어, 거대한 북인 금고, 태극무늬가 그려진 진고도 있었다.

다음은 어가의장실이었다. 이곳엔 임금이 행차할 때 쓰였던 기구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임금을 상징하는 삼각깃발, 백택깃발 등이 있었고, 왕이 행차할 때 쓰이는 각종깃발 초요기(행군할 때 대장이 장수들을 부르고 지휘하는 데에 쓰던 신호용 군기), 벽봉기(푸른 봉황이 그려진 의장기.), 교룡기(임금이 거둥할 때에 행렬의 앞에 세우던 기), 백호기(대오방기 가운데 진영의 오른편에 세워 우군을 지휘하는 데에 쓰던 군기), 정묘기(의장기로 사용한 6정기의 하나), 고초기, 연화작선, 예당, 은월부, 자지개, 작선, 수정창, 옹골타자, 입과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장군을 임명할 때 쓰는 금월부.은월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매우 큰 금.은장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격루실이었다. 들어가니 TV에서만 보던 복원 자격루 모습을 보니 그 크기가 상상을 과연 매우 컸다. 자격루 작동원리를 동영상으로 설명해 놓았는데, 동영상으로 봐도 잘 이해가 안가는데 문서로 기록된 문서를 어떻게 복원해서 저렇게 만들었을까 하고 감탄했다. 자격루주위를 둘러보다가 물흐르는 소리가 들려 진짜 작동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수도꼭지에 물이 새는 소리였고, 실망했었다. 내 생각에 자격루를 실제로 작동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흥미있고 또 인상깊게 봤던건 대한제국실이었다. 내가 방문한 박물관중에서 대한제국기를 집중조명한 곳이 이곳밖에 없고 또 내가 상당히 관심있어했기에 더욱 남달랐다. 이번 관람으로 느낀 것이 많다. 아직도 대한제국에 대한 인식부족, 전시박물관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대한제국에 대해 모르거나 하찮게 여긴다. 대한제국은 결코 하찮지 않았고, 난세에 태어나 갖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의 관심과 생각이 바뀌어 대한제국박물관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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