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경복궁
작성자
류승택
작성일
2011-02-20
조회수
1345

 경복궁이란?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 변형된 궁전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장기계획이 1990년부터 시작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년 철거되었고,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았던 흥례문, 유화문 행각, 기별청, 영제교 등 6동의 '흥례문권역'은 2001년 10월 완료되었다. 군부대가 주둔했던 경복궁 서북쪽 '태원전 권역'의 25개동 469평과 광화문 이전 복원 및 서십자가 복원 등을 골자로 한 '광화문 권역' 복원이 2010년 완료됨으로써 20여년에 걸친 제1차 복원사업이 마무리되었다.

 

 경복궁 답사

들어간 나는 마침 수문장교대식을 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광화문으로 갔다. 나오는 군사들이 북을 두드리며 웅장하게 들어오며 기합을 넣고, 광화문 앞으로 가 수문장끼리 서로 증패를 보여준 뒤 교대식은 끝났다. 그런데 얼마나 외국인이 많은지 주위에선 한국어 듣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내 기분은 한국어를 말하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졌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세계화가 됬는지를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가슴이 벅찼다. 이런 기분을 가슴에 안고 표를 내고 흥례문으로 들어갔다.

 

새해 첫날 지나고 바로 다음날이어서 사람이 없을줄 알았는데 그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엄청난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 인파들을 해치고 근정전으로 들어갔다. 근정전계단은 2층으로 되어있고 봉황무늬 조각이 2개 있었고, 누각은 2층이지만 1층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건축양식을 보니 매우 화려한 단청색이 눈을 자극했고, 7개의 잡상이 있었다. 그리고 둥근기둥에 주심포양식으로 역시 조선의 최대의 궁의 정사를 보는 곳이라 할만 했다. 근정전의 내부를 들여다보니 화려함 그 자체였다. 왕의 옥좌 위의 덮게는 그 작은 공포가 하나하나 작게 끼워맞춰져있어 세세한 부분까지 아름다웠다. 위에는 전등같이 생긴 등이 2개가, 옥좌 앞에는 옥쇄같이 생긴 5개가 있었다. 옥좌 뒤에는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놓여있었다. 천장에는 금색 용 두 마리가 있었다. 아마도 왕을 상징하는 듯 싶다.

 

다음은 사정전이었다. 사정전은 왕이 정사를 논의하는 곳이다. 아침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등 회의가 매일같이 열렸다고 한다. 가운데의 사정전은 업무공간으로 마루만 깔려있지만, 좌우 만춘전, 천추전은 비공식 업무시설로 온돌방이 있었다. 이것은 신하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것 이라고 한다. 사정전 안에도 역시 일월오봉도가 있었고, 청동솥같이 생긴 향로에 꽃그림이 그려져있었다. 특이한건 왕 앞에 용 2마리가 그려져있는 그림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색도 빨강과 하얀색으로밖에 없어보였는데, 처음보는 양식이라 매우 인상적이었다. 근정전만큼 화려하지않지만 역시 주심포 양식으로 화려함은 배가 되었다. 앞 부분에는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있었는데, 각각마다 방마다 사람이름이 붙어있었다. 천추전, 만춘전은 신하들이 공부하던 곳이라 책가도가 있었고, 뒤에는 굴뚝이 있었다.

 

다음은 수정전이었다. 수정전은 궐내각사의 일부였고, 집현전이 이 수정전이었었다. 1867년 중건된 후 집무공간으로 쓰다가 갑오개혁 이후 내각 본부로쓰였다. 수정전은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길이가 길었다. 기둥만 10개였다.

 

다음은 영추문이었다. 교과서 관동별곡에서 배운 연추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게 닫혀있었다.

 

다음은 경회루였다. 이 경회루누각은 경복궁에서 가장 큰 누각인데, 이곳에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고 한다. 내가 갔을땐 물이 다 얼어 있고, 눈까지 덮혀있어 더욱 장관이었다.

 

다음은 강녕전이었다. 강녕전은 사랑채에 해당하여 왕이 독서, 휴식, 신하들과 면담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강녕전은 1918년 교태전과 함께 창덕궁으로 뜯어간 것을 95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강녕전은 그 크기가 매우 커 마루가 3칸, 생활공간이 8칸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곳의 잡상 역시 7개로 근정전과 같았다. 강녕전은 강녕전 건물 이외에도 6개의 건물이 더 있었다.

 

다음은 교태전이었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교태전은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다. 세종때 증축되어 명종때 불타고, 이듬해 다시재건했지만 임란으로 불타고, 고종때 중건됬지만 11년만에 다시 불타고 9년만에 다시 재건됬지만,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뜯어간 비운의 건물이다.

교태전은 강녕전에 비해 사방이 막혀있다. 그러나 뒤에는 왕비의 휴식공간인 아미산이 위치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있다.

 

다음은 자경전이었다. 자경전은 왕실의 웃어른 대비께서 생활공간이다. 뒤뜰에 굴뚝엔 십장생과 포도, 박쥐문양이 있었는데 포도는 자손번영, 박쥐는 부귀를 상징한다고 한다. 자경전의 현판은 현판이 뒤에도 있고 앞에도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ㄴ자 모양의 건물은 궁궐에서 보는건 특이했다.

 

다음은 동궁. 세자께서 생활하신 공간이었다. 동궁은 자선당과 비현각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당이 각보단 서열상 상위이므로 자선당이 대표가 된다. 자선당은 문종임금이 20간 거처하면서 단종을 낳았던 곳이고, 문종이 앵두나무를 많이 심어 앵도궁이라고 불렸다고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약간 지린내가 나서 기분을 불쾌하게했다. 눈이 많이 온 직후라 노상방뇨 했나본데 참으로 몰지각한 사람인 것 같다. 다음은 향원정으로 갔다. 향원정은 경복궁 안에 있는 2층 정자로 1867년에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취향교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라고 한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고 하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런가보구나 하고 생각만 했다.

 

향원정은 물과의 조화가 매우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얼음위에 눈이 덮혀있는 멋도 아름다웠다. 특이한 건 2층마루 올라가는 계단이 매우 불편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왕께서 직접 행차하시기엔 조금 불편해보였다.

 

다음은 건청궁. 1873년에 고종이 정치가로서 스스로 서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건립한 건물이라고한다. 이후 일본 낭인이 명성왕후를 시해한 비극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일제의 훼손으로 사라졌지만, 최근 복원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이 한국 최초의 전기발상지라고도 한다. 건청궁은 다른 궁궐과 다르게 일반 양반가옥처럼 되있어서 단청색이 없고 나무 그 자체의 색으로만 있었다. 단청색으로 눈이 요란해진 나에겐 눈의 휴식도 주었고, 나무색 특유의 멋도 있었다. 그러나 집이 양반집이라도 궁궐은 궁궐. 건청궁 내부에도 일월오악도가 있었다. 개인적으론 건청궁이 경회루 다음으로 아름답다.

 

다음은 집옥재, 팔우정, 협길당이었다. 먼저 협길당은 다은 궁궐 건물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이라면 팔우정과의 독특한 이동통로정도. 다음은 색다른 양식의 집옥재였다. 보통 궁궐의 지붕과는 다르게 맞배지붕을 썼고, 현판은 세로로 적혀있었다. 그리고 양 옆은 벽돌로 지어져있었고, 잡상은 없었다. 아관파천까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으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팔우정. 팔우정은 고유 전통양식이 아닌 양식인데, 중국양식을 모방했다고 한다. 지붕 밑에는 화려한 가림막이 공포를 가리고 있고, 집옥재와 연결통로, 팔우정엔 문풍지 대신 유리가 있었다. 궁궐 단청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단청색이 형광색을 칠해놓은 것 같다.

 

다음은 태원전. 처음엔 태조 이성계의 어진 등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진전으로 시작했다. 1890년엔 신정왕후(조대비)의 빈전으로 쓰였다. 각국 공사 접견실로 사용한 기록도 있다. 훼손 년대는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원전 권역에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출동한 30사단 1개 대대 병력이 눌러앉아 군부대로 쓰이기도 했다고 하니 그동안 문화재에 대해 얼마나 몰지각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태원전의 건축물 중엔 맞배지붕을 한 건물들도 있었다. 입구에서 태원전까지 지붕이 이어져있는 다른 양식을 볼 수 있었다. 구석엔 우물이 있었다. 난 추위에 절어있었는데 마침 햊빛으로 데워진 마루에 앉아 잠시나마 따뜻이 있었다. 구석에 위치하다 보니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눈이 쌓여있는데도 밣지 않은 눈이 많았다.

 

태원전을 다 보고 이제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민속박물관에서 신묘년 토끼전을 한다기에 보고 왔다. 한가지 팁을 주자면 경복궁 티켓이 있으면 민속박물관에서 경복궁을 재입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 나갔다고 돈을 따로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토끼전을 잘보고 다시 재입장한 난 경회루를 다시한번 보고 광화문으로 나섰다. 나설쯤은 1시. 또 다시 수문장교대식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광화문을 찍은 뒤 다시 안양으로 돌아왔다.

 

느낀점

이번 답사로 많은 것을 느낄수 있었다. 특히 앞으로 남은 4궁궐+종묘를 보는 데 있어서 건물을 세세히 보는 안목이 길러졌다. 서로 건축양식을 비교하며 보는것 또한 흥미로웠다. 또 하나 느낀건 일제가 우리나라를, 국가의 얼굴인 궁궐을 얼마나 훼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경복궁은 고종때 중건당시만 해도 경복궁이 꽉 차 있도록 건물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 자리들은 다 헐리고 그 자리엔 그러나 지금은 곳곳에 빈 공간이 수두룩 하다. 게다가 일제는 그 빈 공간에 잔디, 우리에겐 산소에만 까는 죽음의 상징 을 깔아놓았다. 그리고 경복궁의 건물은 헐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일본에까지 있는 경복궁 유물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돌아왔지만, 훼손이 심하여 쓸수 없게 되었다.

궁궐을 돌아다니며 더 많이 알게 되겠지만, 궁궐은 곧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궁궐은 시대의 풍파속의 상처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난 그런 역사를 보여주고 싶다. 꼭 그런 사람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비극의 역사를 알게하여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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