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경주]불국사 청운교,백운교,자하문
작성자
차수정
작성일
2011-04-18
조회수
1704

 

▲2010.8.14 (土)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청운교 높이 3.82m·너비 5.11m, 백운교 높

이 3.15m·너비 5.09m이다. 토함산(吐含山) 줄기를 잘라 남향으로 석단(石壇)을 만들어 고

대(高臺)를 이루었는데, 이 석단 전면(前面) 두 군데에 석계(石階)를 가설하여 당탑(堂塔)

에 오르도록 하였다. 동쪽에 있는 2단의 석계가 바로 이것이며 밑의 것을 청운교, 위의 것

을 백운교라 한다.

18단의 청운교는 등형(登桁)에 의해 좌우로 구분되었으며, 좌우단(左右端)의 등형에는 원

래 난간이 가설되었던 듯하다. 지금은 상하에 석주만 남아 있다. 다리 아래는 작은 석재를

가구(架構)하여 궁륭형(穹?形)을 만들어 통행이 가능케 하였다. 청운교를 올라서 보도(步

道)를 따라 서쪽의 환상적인 범영루(泛影樓) 석주(石柱)를 지나면 극락전 앞에 이른다.

 청운교 위의 백운교는 16단으로, 규모가 작을 뿐 구성양식은 청운교와 같다. 이 다리 밑

에도 작은 궁륭형 통로가 마련되었고, 그 양쪽에서 옆으로 길게 뻗은 얇고 넓은 갑석(甲

石)의 수법 역시 청운교와 같다. 세부양식 또한 서쪽의 석계나 그 밖의 당탑(堂塔)과 조화

를 이루고 있다. 불국사의 중창이 경덕왕 때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이루어졌다고 전

해지므로, 이 석계의 건치(建置) 연대도 그 당시로 추정된다.

 

 

 
 
경북 경주 불국사 대웅전 자하문 앞엔 2층짜리 돌계단 다리가 있다. 국보 23호인 청운교
(靑雲橋) 백운교(白雲橋)다.
흔히 관습적으로 청운교 백운교 하는데 막상 “위쪽 아래쪽 두 개의 돌계단 중 과연 어느
것이 청운교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답하지 못한다. 대개 아래쪽 것을 청운교로,
위쪽 것을 백운교로 알고 있다. 불국사 안내판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학자들이 쓴 가이드
북에도 그렇게 소개돼 있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위쪽이 청운교이고, 아래쪽이 백운교다.
불국사의 역사를 기록한 18세기말의 ‘불국사 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엔 돌계단다리와
자하문의 순서를 자하문-청운교-백운교로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조선 유학자 박종(朴
琮)도 기행문 ‘동경유록(東京遊錄)’에서 ‘위의 돌계단 다리가 청운교, 아래가 백운교’라고
적었다. 대목수 신영훈 한옥문화원장의 설명. “우리는 올라가는 순서를 중시하나 옛사람
들은 대문을 나선 뒤의 순서를 따라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라고 불렀다. 현대인들은 문을
들어가는 시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옛 사람들은 문을 나가기 위한 시설로 여겼다.”
그럼, 그 옆 안양문 앞의 국보 22호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寶橋)는 어떠한가. 불국사
안내판 등은 모두 아래쪽이 연화교, 위쪽이 칠보교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경우는 옳다.
‘불국사 고금창기’에 안양문-칠보교-연화교 순으로 적혀 있고 실제로 아래쪽 계단엔 연꽃
이 조각돼 있어 연화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불국사 자하문앞 국보23호 2층 돌계단 다리 [문화재 X파일中]
 
 
 
청운교, 백운교에 적용된 피타고라스의 정의
 
청운교, 백운교의 경사(기울기)는 '피타고라스정의'와 같이 내각의 합이 180도이고, 변의
길이는 3:4:5 의 비율로 되어 있다. 그 시대에 '피타고라스정의'를 알았던 것일까?
  당시 신라는 아시아의 인도는 물론 피타고라스가 살았던 그리스의 교류가 있었던 만큼,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되는 과정에 피타고라스정의도 전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나오기 수백 년 전에 나온 고대 중국 수학책인 주비산경[周?算經]에
“구(勾)를 3, 고(股)를 4라고 할 때 현(弦)은 5가 된다.”고 “구고현(勾股弦)의 정리”를 설
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피타고라스 정의와 같은 것으로 널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고현(勾股弦)은 우리의 신체구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무릎을 90도로 구부렸을 때
“발뒤꿈치-장딴지-무릎-엉치뼈”로 이어지며 만드는 직삼각형은 대략 3:4:5의 비례가 된
다.
   이처럼 돌계단 하나에도 인체구조와 수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900년대 초 청운교 백운교,그리고 자하문 모습]
 
 
[1900년대 초 청운교 백운교,그리고 자하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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