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8.14(土)
|
|
지정종목
| 국보 |
지정번호
| 국보 제31호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 |
시대
| 신라 |
종류/분류
| 천문대 |
크기
|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정의
별을 관측하기 위하여 높이 쌓은 대.
2. 건립목적
별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역법(歷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보정하기 위하여 별이나 일월오성(日月五星)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점성학(占星學)으로 발전하였고, 후자는 천문학 또는 역학(歷學)으로 발전하였다. 이 두 가지 관측의 비중은 시대가 지날수록 후자쪽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의 첨성대도 점성학적인 비중이 컸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3. 역사
(1) 고구려 고구려의 첨성대에 대하여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廟)와 9지(池)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里)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첨성대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2) 신라 ≪삼국유사≫·≪고려사≫·≪세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에 기재되어 있는데,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상방하원(上方下圓: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며, 높이는 19척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하였다. 이 기록은 경주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실물과 일치된다. 이 첨성대는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리었으며, 현재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3) 백제 백제의 첨성대에 대하여는 문헌의 기록도 없고 유지(遺址)도 없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과 천문역법을 교류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 ≪일본서기≫에 나타난 첨성대가 있었을 것이다.
(4) 고려 고려의 첨성대에 대한 기록도 별로 없다. 그러나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정상의 참성단(塹星壇)의 기록과 유지, 그리고 개성 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첨성대라고 구전(口傳)되는 석조물이 전하여오고 있다. 여러 지리지에 의하면, 참성단은 돌을 쌓아서 만든 것으로 높이가 10척 상방하원이며, 위의 사면(四面)이 각각 6척6촌, 아래의 원 너비가 각각 15척인데,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으로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어서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承旨)을 보내어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점성과 제천(祭天)의 관계, 참성단과 경주 첨성대의 상방하원의 형태상의 유사, 명칭의 유사성, 그뒤 조선시대에 마니산 산정에서 천문관측을 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고려가 몽고의 침공을 받았던 강도시대(江都時代)에 만든 첨성단이 아니었던가 여겨지기도 한다. 만월대의 첨성대는 높이 3m 가량의 다섯개의 석주(石柱)로 받친 석대(石臺)로서 위의 평면넓이가 대략 9㎡이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7년(1281) 원나라로부터 수시력(授時曆)이 전래되어, 왕은 태사원(太史院)에 명하여 영대(靈臺)를 만들고 천문기기(天文器機:觀象)를 만들어서 일월(日月)을 측험(測驗)하여 도수(度數)가 맞는가를 상고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때부터 영대 위에 측기(測器)를 놓고 천문관측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만월대의 첨성대가 위의 기록과 같은 관측에 사용되었던 관천대(觀天臺)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하겠다.
(5) 조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초부터 고려의 서운관(太卜監과 太史局을 합친 것)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1420년(세종 2)에는 첨성대를 세우고, 그뒤에 다시 경복궁 안의 서운관을 확충하여 간의(簡儀)를 비롯한 천문기기를 10여종이나 만들어서 설치하고 관측을 실시하였다. 그 중 간의를 올려놓은 간의대(簡儀臺)는 돌로 쌓은 것으로 높이가 31척, 길이가 47척, 너비가 32척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더불어 관상감(서운관의 바뀐 명칭)이 불타 없어지자, 1688년(숙종 14) 남구만(南九萬)이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터를 잡아 관상감을 재건하고, 별을 관측하는 대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곧 창덕궁 금호문(金虎門:지금의 (주)현대건설 자리) 밖에 있는 높이 3.5m, 넓이 2.4m×2.5m의 관천대(觀天臺)이다. 이 대 위에는 높이 1m의 네모진 돌이 있는데 관측할 때에 소간의를 안치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대를 일명 소간의대(小簡儀臺)라 하고 속명(俗名)으로는 첨성대라 한다고 ≪서운관지(書雲觀志)≫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창경궁 안에도 관천대가 남아 있는데 높이 3m, 넓이 2.9m×2.3m이며, 역시 그위에 높이 1m 정도의 네모진 돌이 놓여 있다. 1715년(숙종 41) 또 하나의 관상감을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밖에 만들었는데, 거기도 관천대가 있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다. |
cf . 개성첨성대의기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첨성대 석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