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울 景福宮 踏査 後 ! 1,2,3,4.
작성자
송철효
작성일
2011-06-15
조회수
1310

* 서울 景福宮 踏査 後 ! 1,2,3,4.

 

1. 槪   要 : ⑴~⑻.

 

⑴. 日 時 : 2011年 05月 28日. 09:00~12:00.

⑵. 場 所 : 景福宮 境內.

⑶. 主 管 : 文化財廳.

⑷. 目 的 : 接하지 못한 景福宮의 文化遺産 踏査.

⑸. 氣 候 : 무더운 初여름.

⑹. 寫 眞 : 添附 하였습니다.

⑺. 作 成 : 文化財 지킴이 宋 哲 孝.

⑻. 槪 括 : ①, ②, ③.

 

①. 2011年 05月 28日 오늘은 午後 日程을 기다리면서 史蹟 第117號로 서울에 있는 朝鮮時代 5代 宮闕 中 正宮에 該當하며 北쪽에 자리하고 있어 北闕로도 불리는 朝鮮王朝 太祖 李成桂가 漢陽으로 都邑을 정하고 가장 먼저 築造한 宮闕의 하나인 景福宮을 踏査하였습니다. 1394年(太祖 3) 12月 04日 始作된 이 工事는 이듬해 9月 大部分 完工되었으며 宮의 이름은 詩經에 나오는 王朝의 큰 福을 빈다는 뜻으로 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옮겼습니다. 5代 宮闕 中 가장 먼저 지었으나 이곳에 王이 起居한 期間은 1405年(太宗 5) 建築한 別宮인 昌德宮에 비해 짧고 世宗, 文宗, 端宗이 이곳에 起居했으며 王子의 亂으로 인한 개성천도 期間 동안 宮闕은 비어있었으며 王位를 簒奪한 世祖가 景福宮을 忌避해 昌德宮에 起居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宮이 되었습니다. 1543年(中宗 38) 東宮에서 일어난 火災와 1553年(明宗 8)에 일어난 火災로 많은 被害를 입어 이듬해 復舊되었으나 38年 後 壬辰倭亂으로 인해 모든 建物이 불타 270餘 年間 廢墟狀態로 있다가 1865年(高宗 2) 大規模 再建工事가 始作되었습니다.

 

②. 1868年 高宗이 옮겨왔으나 1876年에 大規模 火災로 다시 昌德宮으로 옮겼다가 1888年 또 다시 옮기는 等 被害와 復舊가 거듭되었습니다. 1904年 이곳에 統監府가 들어섰고 1917年 11月에 昌德宮의 大規模 火災 뒤 이를 復舊하기 위해 1918~20年 旣存의 建物을 解體하여 이곳에서 나온 建築資財의 放賣와 國立 中央 博物館이었던 朝鮮總督府 建物의 建立 等 本來의 모습을 잃었으나 1996年 12月 朝鮮總督府 建物의 撤去 等으로 一部가 復舊되었습니다. 景福宮은 白岳과 三角山을 등지고 漢城中心 左右에 六曹官衙가 있는 大路廣場에 築造된 宮闕로서 中國의 古代 宮闕을 만드는 法式인 하늘의 별자리를 본뜬 五星座 配置를 그대로 따랐으며 正殿인 勤政殿을 中心으로 南北 軸 線上에 主要建物을 左右對稱으로 配置하면서 正殿과 便殿은 앞부분에 寢殿과 후원은 뒷부분에 配置하는 前朝 後寢의 格式을 갖추고 있고 직 4각형에 가까운 대지 周圍를 담장으로 둘러싸고 東門 建春門, 西門 迎秋門, 南門 光化門, 北門 神武門 等 4個의 門을 만들어 宮闕 안은 正門인 光化門으로부터 弘禮門과 禁川을 가로지른 永齊橋와 勤政殿을 둘러싼 回廊의 正門인 勤政門과 政事를 보던 思政殿 뒤의 향오문(嚮五門)을 一直線上에 配置하였습니다.

 

③. 光化門과 嚮五門 사이 勤政門을 境界로 2개의 영역으로 나뉘는데 이는 中國에서 宮闕을 構成하는 方法인 三門三朝의 構成法을 따른 것으로 2단의 月臺 위에 자리한 勤政殿과 이를 둘러싼 回廊을 中心으로 한 이곳은 治朝로 主로 臣下들의 朝禮를 받던 곳이며 바닥에는 넓은 薄石을 깔고 左右對稱을 이루어 보다 强한 權威를 나타냅니다. 光化門과 勤政門 사이의 空間은 外朝에 該當되어 寢殿으로 通하는 路門인 嚮五門 뒤에는 王의 寢殿인 康寧殿과 王后의 寢殿인 交泰殿을 비롯해 東쪽에 왕대비가 살던 慈慶殿 等 많은 寢殿들이 있었던 건물들이 1918~20年에 解體되어 昌德宮의 熙政殿과 大造殿 等을 補修하는 데 建築資材로 使用되고 一部는 一般人에게 販賣하는 等 大部分 紛失되고 現在 慈慶殿과 交泰殿 뒤뜰의 峨嵋山과 벽돌로 쌓은 굴뚝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많은 寶物級 塔들은 朝鮮의 精氣를 抑壓하려는 日本人에 의해 解體되어 現在는 다른 場所로 옮겨져 옛 모습을 되찾고자 復元工事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現在 勤政殿(國寶 第223號), 慶會樓(國寶 第224號), 慈慶殿(寶物 第809號), 勤政門 및 行閣(寶物 第812號), 思政殿, 천추전, 수정전, 집경당, 함화당, 재수각, 香遠亭, 集玉齋, 협길당 等의 建物과 경천사 10層 石塔(國寶 第86號)을 비롯하여 日帝强占期에 옮겨놓은 많은 國寶, 寶物級 石彫 文化財가 있으며 朝鮮時代의 다른 宮闕에 비해 全體모습이 整然한 體系를 갖추고 있어 宮闕配置를 硏究하는데 貴重한 資料입니다.

 

2.內 容 : ⑴ ~ ⑽.

 

⑴. 景福宮은 朝鮮王朝의 法宮으로 北嶽山을 뒤로하고 자리 잡았고 正門인 光化門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세종로)가 펼쳐져 王都인 漢陽(서울)의 中心이기도 합니다. 1395年 太祖 李成桂가 創建하였고 1592年 壬辰倭亂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興宣大院君 主導로 高宗 때 1867年 重建 되었습니다. 景福宮은 500餘 동의 建物들이 빼곡히 들어선 雄壯한 모습 이었습니다. 宮闕 안에는 王과 官吏들의 政務施設 王族들의 生活空間 休息을 위한 後援空間이 조성되었습니다. 王妃의 中宮 世子의 東宮 高宗이 만든 乾淸宮 等 宮闕 안에 다시 여러 작은 宮들이 모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日帝强占期에 大部分의 建物들을 撤去하여 勤政殿 等 一部 中心 建物만 남았고 朝鮮總督府 廳舍를 지어 宮闕 自體를 가려버렸습니다. 1990年부터 復元事業이 推進되어 總督府 建物을 撤去하고 興禮門을 復元하였으며 王과 王妃의 寢殿, 東宮, 乾淸宮,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光化門➝興禮門➝勤政門➝勤政殿➝思政殿➝康寧殿➝交泰殿을 잇는 部分은 宮闕의 核心 空間으로 幾何學的 秩序에 따라 對稱的으로 建築 되었습니다. 그러나 中心部를 除外한 建築物들은 非對稱的으로 配置되어 變化와 統一의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며 首都 서울의 中心이고 朝鮮의 宮闕인 景福宮에서 格調 높고 品位 있는 王室文化를 體驗합니다.

 

⑵. 朝鮮宮闕建築은 太祖 李成桂가 修昌宮에서 1392年 07月 17日 卽位함으로서 開國되었고 太祖 3年(1394) 8月에 高麗 때 남경이었던 漢陽에 행차하여 宮闕 地를 둘러보고 10月에 遷都를하였습니다. 太祖 3年(1395) 遷都 當時에는 宮闕이 없어 漢陽府의 客舍를 臨時 王宮으로 使用한 것이 太祖實錄 3年 11月 乙亥 朝를 보면 한양에서 優先的으로 建立할 것으로 寢朝 宮室 都城이었습니다. 太祖 4年에 一般民家의 家基量給과 社稷壇, 宗廟, 景福宮의 고성이 있던 해 10月에 各 殿閣들의 이름이 지어졌으며 景福宮은 朝鮮의 法宮으로 가장 莊嚴하게 지어진 宮闕이었으나 初期 太宗이 太宗 5年 10月에 昌德宮으로 移宮하여 비워 있다가 世宗 11年 思政殿에 慶會樓의 重修 13年 光化門의 개루(改樓), 14年 文昭殿의 創建, 15年 康寧殿의 개구 神武門 等을 建立 正宮으로 使用하였으나 明宗 8年 9月에 火災로 康寧殿, 思政殿, 흠경각 等이 燒失되었고 그 後 宣祖 25年 4月 壬辰倭亂으로 全燒되어 高宗 2年 4月 景福宮의 重建까지 廢墟로 放置되었습니다. 高宗 2年 4月 景福宮의 重建工事가 始作되어 大部分의 殿閣들이 重建되었으나 高宗 13年 다시 火災로 燒失되었고 高宗 25年에 이르러 재차 重建하였으나 日帝가 1917年 昌德宮의 寢殿에 大朝殿 行閣 나인 방에서 난 불로 內殿이 燒失되자 이를 復舊한다는 名分으로 景福宮의 大部分의 殿閣들을 헐어냈을 뿐만 아니라 日帝가 興禮門 과 周邊 行閣을 헐고 그 자리에 朝鮮總督府廳舍를 本來의 景福宮 坐向인 癸坐丁向과 어긋나는 子坐午向으로 配置함으로써 事實上 朝鮮王朝의 脈이 끊긴 체 現在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⑶. 勤政殿은 景福宮의 正殿으로 國寶 第 223號이며 1395年(太祖 4)에 지은 建物이 壬辰倭亂 때 불타고 現在의 建物은 1867年 重建된 것으로 2층 木造建物로 臣下들의 朝賀를 받던 곳이며 二段으로 된 月臺위에 위치하며 月臺 주위에 새겨진 十二支像은 正殿 守護이고 月臺의 周圍를 둘러싼 回廊은 興禮門의 左右에서 始作해 嚮五門의 左右로 연결 勤政門과 思政門의 左右에 이어져 직사각형 回廊이 3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지고 勤政殿의 左右 回廊에는 東쪽에 隆文樓 西쪽에 隆武樓 北쪽에 東西 行閣門인 啓仁門과 協義門이 있고 勤政殿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門樓인 勤政門 左右에 日華門과 月華門을 두어 權威性을 나타내고 있으며 앞면 5칸 옆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아래층 고주가 위층의 변주가 되는 構造이며 창방➝평방 위에 놓인 다포계의 栱包는 外三出目 內四出目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방향으로 튀어나온 安草工을 두었고 栱包의 全體造型은 판 재화하는 朝鮮後期 多包 계 建物의 一般的 形態로 천장은 대들보 윗부분부터 우물천장으로 천장 中央에는 多包계의 천개를 설치하고 개판에 雲龍을 부조했으며 팔작지붕의 지붕마루는 모두 兩城을 했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를 추녀마루 위에는 龍頭와 雜像을 올려놓았으며 사래 끝에는 吐首를 달아 威嚴을 더했으며 朝鮮時代 宮闕에서 가장 높고 크며 朝鮮後期 다포 계 建築의 特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⑷. 思政殿은 正殿인 勤政殿 뒤에 있는 便殿으로 王이 平常時에 居處하면서 政事를 보던 建物로써 創建年代는 확실치 않으나 1429年(世宗 11) 重修했고 다른 殿閣들과 마찬가지로 壬辰倭亂 때 불타버려 1865년(高宗 2) 重建했으며 앞면 5칸 옆면 3칸의 單層 팔작지붕으로 마당보다 약간 높게 圓柱를 세워 사면의 기둥 사이에 土壁을 치지 않고 4분의 光窓과 문짝[門扉]을 짜고 기둥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두고 內, 外 二出目의 栱包를 놓았으며 지붕마루는 兩成을 하고 취두(鷲頭), 龍頭, 雜像을 配列하고 內部는 우물천장으로 작은 내부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特別한 架構法을 썼고 御座를 치한 뒷벽에는 雲龍이 그려져 있는데 景福宮의 唯一한 壁畵입니다. 西쪽에는 千秋殿이 東쪽에는 萬春殿이 있는데 萬春殿은 6·25戰爭 때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으며 昌德宮과 昌慶宮의 便殿은 正殿의 側面에 있는데 이 建物은 正殿의 정북방에 있어 正宮으로서의 秩序整然한 配置原則에 의거하였습니다.

 

⑸. 慶會樓는 景福宮 안에 있는 最大의 木造樓閣으로 國寶 第 224號이고 外國 使臣의 接待와 宴會를 베풀던 곳으로 現在 建物은 1867年(高宗 4) 다시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景福宮의 西北쪽에 연못을 파고 작은 規模로 지었던 것을 1412年(太宗 12) 工曹判書 朴子靑에게 命해 西쪽으로 옮겨 큰 연못을 파고 4각형의 人工 섬 위에 더 크게 세웠으며 慶會樓로 지었고 파낸 흙으로는 寢殿 뒤편에 峨嵋山을 만들었고 1429年(世宗 11) 重修되어 1475年(成宗 6) 다시 고칠 때 48個의 石柱에 구름 속에서 노니는 龍을 조각해 朝鮮 3代 壯觀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1505年(燕山君 11)에 연못 서쪽에 만세 山을 만들어 1592年(宣祖 25) 한양의 백성들에 의해 불타버렸다가 1865年(高宗 2) 景福宮 重建工事 때 다시 짓기 始作해 1867年 完工되었으며 앞면 7칸 옆면 5칸의 重層 建物로 翼工系 樣式이며 팔작지붕인 이 建物은 長臺石으로 築造된 기단 위에 서 있고 아래층은 외주방형과 내주원형으로 된 48개의 민흘림석주가 上層木造部分을 지탱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方塼을 깔았고 우물천장을 아름답게 丹靑했고 慶會樓가 갖는 建築的 特徵은 平面構造 칸수 기둥 수 부재 길이 및 창의 수 等 主役의 理論을 適用해 神仙의 世界를 만들려고 했으며 1865年 정 학 순 慶會樓에서 建物의 細部內容이 자세하게 記錄되어 있고 慶會樓는 機能의 完全性과 獨立主에 의한 아름다운 비례의 建築美를 자랑하며 더욱 주변 산봉과 서로 어울려 연못에 反映된 絶妙한 景觀은 樓閣 建築의 最高로 慶會樓 重建에 앞서 이 建物의 空間構成을 易의 原理에 基礎하여 풀이한 글이 쓰여 졌는데 정 학 순이 적은 慶會樓全圖로 여기에는 慶會樓가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육육궁의 原理에 따라 지어졌다고 적혀 있어 6은 본래 8괘에서 큰물을 의미하는 수이며 慶會樓를 구성하고 있는 空間과 構造部財의 改修 等이 6宮의 原理를 따랐다는 것이며 慶會樓 築造에 應用된 宇宙의 原理를 慶會樓全圖에 記錄되어 있습니다.

 

⑹. 康寧殿은 景福宮 안에 있던 王의 寢殿으로 1395年(太祖 4) 思政殿 北쪽에 세워졌는데 書經의 洪範篇에서 五福 中 康寧을 堂號로 하였고 1433년(世宗 15) 重修했으며 1553年(明宗 8) 불탄 것을 이듬해 重建했으나 壬辰倭亂 때 戰禍로 불타 없어진 것을 1865年 景福宮 重建 때 다시 築造한 內殿의 최고 殿閣으로 앞면 11칸 옆면 5칸의 單層 팔작지붕이며 長臺石 바로 쌓기 한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 礎石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쇠서 2개를 둔 二翼工집이며 特히 王妃 寢殿인 交泰殿과 함께 지붕 용마루를 兩成하지 않음으로써 寢殿임을 象徵했습니다. 1917年 불타버린 昌德宮의 內殿을 再建한다는 구실로 日本人들에 의해 헐리어 建築部財로 使用되었습니다.

 

⑺. 交泰殿은 景福宮 안에 있는 王妃의 寢殿으로 景福宮 創建 當時(1395 太祖 4)는 없었으나 1443년(世宗 25) 增築되었으며 1553年(明宗 8) 불탄 것을 이듬해 重建했으나 壬辰倭亂 때 다시 불타 1865年(高宗 2) 重建되었는데 1876年 불탄 것을 1888年 再建했으나 1920年 昌德宮 大朝殿을 짓는다는 名分으로 王의 寢殿인 康寧殿과 함께 日本人들에 의해서 헐려 建築部財로 使用되었고 現在 이 자리에는 日帝時代에 日本人들이 강제로 옮겨온 石塔, 浮屠 等의 石造物들이 있으며 交泰殿 뒤뜰의 峨嵋山 굴뚝에 새겨진 十長生, 梅, 蘭, 菊, 竹과 吉祥의 무늬로 보아 150여 채의 宮闕建物 가운데 가장 華麗하게 築造되었던 것으로 推定되며 朝鮮古蹟圖譜에 1920年 當時 寫眞과 平面圖가 있어 元型推定이 可能합니다.

 

⑻. 慈慶殿은 景福宮에 남아 있는 唯一한 寢殿建物로 寶物 第809號로 1867年 紫薇堂 터에 趙大妃를 위해 建立되었는데 불타 1888年(高宗 25) 重建되어 現在에 이르고 있으며 앞 10칸, 옆 4칸의 長方形 平面의 東쪽 正面에 앞 1칸 옆 2칸의 淸讌樓와 앞 6칸 옆 2칸의 協慶堂 그리고 西쪽 뒤에 앞 2칸 옆 6칸의 방과 대청이 있어 全體的으로 'ㄴ'字形이고 慈慶殿 十長生 굴뚝(寶物 第 810號) 不老長生을 象徵하는 十長生 무늬와 당초문 그리고 박쥐문을 精巧하게 새겨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굴뚝을 旣存의 담장에 쌓아 담장의 일부처럼 보이게 한 것도 돋보이며 長臺石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한 높은 基壇 위에 礎石을 놓고 方柱를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했습니다. 二翼工인데 柱間에 雲工을 3가닥씩 附加해 煩雜한 느낌을 주나 華麗하며 앞면의 中央 3칸은 툇마루로 나머지는 띠 살 창호를 달았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殿閣을 둘러싼 行閣과 담장에 吉祥, 長壽, 벽사, 초복의 무늬가 장식되어 매우 多樣하고 아름다우며 慈慶殿 西쪽담장 외벽에는 매화, 천도,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等을 색깔 있는 벽돌장식으로 아름다운 造形美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⑼. 集玉齋는 高宗이 서재로 使用하던 建物로 神武門 東쪽에 있으며 앞면 5칸 옆면 3칸의 單層 맞배집으로 연판(蓮瓣) 等이 장식된 높은 基壇 위에 서 있으며 礎石 위에는 鼓腹石을 使用해 다른 建物과는 다른 面을 보여주고 기둥 위에 安草工을 使用했으며 두공은 多包式으로 첨차(檐遮)의 內外와 兩 側面에 纖細한 波蓮草를 조각했습니다. 行工檐遮는 雲頭가 매우 높아서 소로(小累)가 다른 建物에 비해 높고 建物 前面의 툇간을 全部 開放하고 兩 側面은 박공마루까지 전벽(塼壁)을 쌓았고 8쌍의 雙孔을 만들어 全體的으로 景福宮 內의 다른 建物에 비해 中國的인 面을 많이 지녔으며 集玉齋, 협길당, 팔우정 3채의 建物은 當初 昌德宮 含寧殿의 別堂으로 지어진 建物이었으나 1888年 高宗이 昌德宮에서 景福宮으로 옮기면서 이 殿閣들도 옮겼으며 高宗은 이 建物들을 御眞의 奉安 場所와 書齋 兼 外國使臣 接見場으로 使用(1893年 英國, 日本, 오스트리아 等 外國 公使 接見)하였고 이 3채의 建物은 景福宮의 다른 殿閣들과 달리 中國樣式으로 當時로서는 新式이라고 생각되던 中國風習을 導入한 것으로 集玉齋의 懸板을 宋나라 名筆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集字하여 中國式으로 한 것도 이러한 연유입니다.

 

⑽. 香遠亭은 景福宮 안에 있는 2層 亭子로 高宗이 乾淸宮(乾淸宮 : 國立 民俗博物館)에 起居하던 1867年 慶會樓 西北쪽에 연못을 파고 그 中央에 지은 것으로 乾淸宮과 香遠亭 사이에 다리를 놓아 醉香橋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戰爭 때 破壞되고 現在의 다리는 1953年 南쪽에 새로 놓은 것이며 香遠亭은 景福宮 후원에 있는 樓閣으로 2층 規模의 翼工式 기와지붕이며 樓閣의 平面은 정육각형 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워 1層과 2層을 한 나무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四分閤을 놓았으며 特히 연못 다리는 香遠亭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며 1867∼1873年에 세운 것으로 推定되고 高宗이 乾淸宮을 지을 때 옛 後援인 서 현정 一帶를 새롭게 造成하였는데 연못 가운데 人工 섬을 만들고 그 위에 六角形 亭子를 지어서 香氣가 멀리 퍼진다고 香遠亭이라 불렀으며 香遠池를 건너는 다리는 香氣에 醉한다는 뜻의 醉香橋이며 醉香橋는 朝鮮時代 연못에 놓인 가장 긴 木橋로 지금은 南쪽에서 다리를 건너 섬에 가도록 되었지만 元來는 醉香橋가 北쪽에 있어 乾淸宮 쪽에서 건널 수 있었고 香遠池의 根源은 地下水와 열상진원 샘이며 이 물은 慶會樓의 蓮池로 흐르도록 되어 있으며 亭子는 정육각형으로 長臺石으로 된 낮은 基壇 위에 六角形의 礎石을 놓고 그 위에 1, 2層을 貫通하는 육각기둥을 세워 1層에는 平欄干을 2層에는 鷄子欄干을 두른 툇마루가 있고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中央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었습니다.

 

3. 結 論.

 

景福宮 내에 國立 中央 博物館(國立 民俗博物館) 厚生館(文化財硏究所) 等이 建立되고 西北쪽에는 軍部隊가 駐屯하였습니다. 光化門은 1950年 韓國戰爭으로 門樓가 타버리고 石築만 남아있는 것을 1963年에 元來 位置에다 콘크리트 構造로 復元하였으며 以後 1990年에 들어서 大韓民國 政府는 20年 計劃으로 景福宮 復元事業 1次 復元 整備 事業을 始作하였으며 이 過程에서 朝鮮總督府 廳舍를 1995年에서 1996年에 걸쳐 文民政府가 撤去하여 2010年 現在 景福宮 1次 復元 整備 事業이 完了되어 89동 8987㎡(2720평)의 建物이 復元되었습니다. 日帝의 撤去를 避해 남아 있던 建物 36동을 包含해 現在 總 125동의 建物이 들어서 高宗 當時 景福宮 建物 500여 동의 略 25%에 到達하였고 2010年 9月 以後 光化門권역이 完全 開放되며 以後 復元作業은 2次 整備事業과 長期復元으로 나누어져 2次復元에는 수정전 앞 궐내각사지역이 現在 復元이 進行 中이며 興復殿권역이 復元豫定에 있고 全體的인 궁장과 동서십자각도 復元豫定이며 2次 事業까지 完了하면 高宗當時의 75%까지 復元이 되며 그 以後 長期 復元計劃은 國立 古宮 博物館과 國立 民俗博物館 및 管理 事務所 駐車場 等 施設의 移轉에 맞춰 進行되고있습니다.

 

4. 感謝 합니다! 2011年 06月 09日. 文化財지킴이 宋 哲 孝(珍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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