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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릉 폐사지(신복사지,굴산사지)에서 고려시대 불교유적을 느끼다.
작성자
박종문
작성일
2020-07-29
조회수
226
2020년 우리얼 제 710차 전체답사 【 답사 개요 】 - 답사 종류 : 전체답사 - 답 사 지 : 강릉 신복사지, 굴산사지,경포대, 사천진 해변 - 주 제 : 강릉 폐사지에서 고려시대 불교유적을 느끼다. - 부 제: 온고이지신 - 답사 일시 : 2020년 7월 11일 ○ 강릉 신복사지 (江陵神福寺址)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에 있는 신복 사지는 통일신라 때 범일 국사가 창건한 신복사의 절터이다. 건물터들의 배치 양식과 남아있는 보살상의 양식을 통해 고려 초기의 양식으로 추정되며 당시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 유행하던 양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절터에는 보물 제87호로 지정이 된 3층 석탑과 보물 제84호로 지정이 된 보살상이 남아있다. 신복사지(神福寺址 )는 1990년에 강릉대학교 박물관과 2005년에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건물지 3기, 석축 1기, 구들시설1기가 3층 석탑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건물지1은 신복사의 금당지로 추정된다. 삼층석탑의 남쪽 10m 지점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구를 살펴보면 초석 위에 초석이 올려져 있고, 적심과 적심 사이에 또 다른 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의 증·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를 둘러싸고 ‘冂’ 형태의 담장지가 발굴되었고, 건물지와 담장지 사이에서 암거(暗渠)시설로 추정되는 석렬 1기가 발견되었다. 건물지2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삼층석탑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15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건물지3은 건물지 1과 직각방향으로 건물지2의 맞은편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주위에서 담장지와 배수로로 추정되는 석렬이 발견되었다. 석축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쌓았으며, 일부는 자연석으로 열을 맞추어 올렸다. 석축은 신복사지의 사역을 표시하고, 산으로부터 토사가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구들 시설은 탑의 남동쪽에서 화구부와 굴뚝시설, 고래 등이 발견되었다. 신복사지의 배치는 삼층석탑을 기준으로 뒤에는 금당지, 양쪽 옆에는 회랑지가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배치양식이다. 현재 삼층석탑(보물 제87호)과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이 사지내에 있으며, ‘神福(신복)’, ‘神福寺(신복사)’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신복사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강릉 시내에서 내곡동의 관동대학교 방향으로 가다 강릉시 보건소에 못미쳐 좌측으로 진입하는 작은 길로 들어선다. 이 소로를 따라가다 보면 곡간 사이에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이 있으며, 주변 일대가 신복사지이다. 수많은 옛 절터들이 있지만 신복 사지의 3층 석탑과 보살상은 꽤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 당시 유행하던 양식을 알 수 있다. 신복사지 삼층석탑은 상륜부에 연꽃 보주와 옥개석 전각이 올라가서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다. 기단부에는 직사각형의 홈이 있어 사리,불경을 두는 장식을 한것 같다 전체적으로 석탑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범일국사와 굴산사지 옛날 학산리(지금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마을에 한 처녀가 굴산사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자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물을 마셨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처녀에게 태기가 있어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산모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산짐승들이 모여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날개를 펴서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산모는 비범한 아이가 될 것이라고 믿고 아기를 데려와 키웠다. 아기가 자라자 당시의 서울인 경주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아이는 나중에 국사(國師)가 되었는데,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고 하여 범일국사(泛日國師)라고 부르게 되었다. 범일국사는 구산선문의 한 곳인 사굴산파를 개창한 선승이다. 속가의 이름은 김품일이고,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 탑호는 연휘(延徽)다. 그는 흥덕왕 6년(831) 2월 당나라에 유학하여 여러 고승들을 만났고, 중국의 고승 마조선사의 제자인 제안(齊安)에게서 성불의 가르침을 받았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을 곧 도라고 한다.” 범일국사는 문성왕 6년(844)에 귀국한 후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물렀으며, 명주도독의 요청에 따라 굴산사로 옮겨서 40여 년 동안 후학을 가르쳤다. 깨달음이 깊었던 범일국사를 신라 조정의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국사로 모시려고 하였으나 그는 모두 거절하였다. 보현사를 세운 낭원대사 개청(開淸)과 행적(行寂)이 그의 제자다. 범일국사는 훗날 학산에 돌아와 자신의 지팡이를 던져 그것이 꽂힌 곳에 절을 지어 심복사(尋福寺)라고 하였다. 굴산사지 부도는 신라 선덕여왕 13년에 범일국사가 굴산사를 세울 때 만든 것으로, 보물 제85호로 지정되었다. 강릉시 성산면 보현사 입구에는 조선시대 부도 20기가 세워진 부도밭이 있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너른 들판에는 당간지주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이름 하여 굴산사지 당간지주로, 이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세워졌던 굴산사는 신라 문성왕 14년(852)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의 본산이다. 사찰의 당우가 약 300미터에 이르렀던 이 절은 강릉 지방에서 가장 큰 절이었고, 승려만도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나라 곳곳에서 범일국사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쌀 씻은 물이 동해 바다에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큰 절이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 뒤 굴산사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다가 1956년 큰 홍수 때 주춧돌 여섯 개가 드러났으며, 절터에서 ‘문굴산사(門掘山寺)’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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