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전주지역[삼국시대 완산주完山州]불교문화의 발원지
작성자
노영기
작성일
2011-06-17
조회수
1147
 

<전주지역[삼국시대 완산주完山州]불교문화의 발원지

『고 덕산 경복사景福寺 와 말사(末寺)인 보광사寶光寺』>


직접작성 글쓴이:  노 영기盧 榮 基

[사진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고덕산 경복사◑ [전라북도 기념물108호]

 

나,당 연합군 이 합동으로 고구려 와 백제를 멸(滅)하기위한 전쟁이 한참이던 때이다,

 

시기는 650년 고구려에선 영류왕을 시해(弑害)하고 쿠데타 를 일으켜 집권하게 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은 영류왕 의 동생인 장(臧)을 새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이다. 이후 재상(宰相)이 된

 

연개소문 이 보장 왕 에게 말하기를

 

 유,불,도교 가 모두 왕성하게 커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도교)가 융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합 시다, 라고 말한 후에

 

왕이 허락을 하니 당으로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해오고 그후 나라전역으로

 

도교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고승 보덕이 왕에게 말씀하기를

 

그동안 불교가 나라를 이끄는데 큰 공을 다하였는데 이와 정 반대되는 도교가 들어

 

오게 되면 앞으로 나라가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라고 여러 차례 말을 하였지만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를 민망하게 여긴 고승 보덕 은 큰 수제자인 명덕

 

(전주 남고,서고사 창건스님)에게 묻기를 인제는 나라가 도교만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몸을 편히 피할 곳

 

어디 없을까? 라고 물으니 제자 명덕 이 스승께 합장 후 말하였다, 남쪽 백제 땅

 

이 스승의 불법을 전하는데 좋은 곳입니다, 라고 말한 후 물러났다, 그후 몇일 이

 

지나서 고승 보덕 은 그의 신력 인 (天眼通)으로 제자들이 모두 잠든 야심한 밤중에 좌불안석 으

 

로 두 눈을 지긋 이 감고 신통력을 발휘하니 어느 세 절은

 

바람에 구름 가듯 사뿐히 날면서 금세 백제 땅 완산주 고덕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안착을 하니 이를 두고 (고구려 고승 보덕 신력으로 절을 날려 오다 라는 뜻의)

 

비래방장 이라한다,


 

* 전주 경복사 의 창건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에는 단지 보덕대사는 그대로 가만히 앉아 좌선수행을 했을 뿐인데 창 넘

 

어 로 보이는 풍경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바뀌어져 있던

 

것 이었다, 이윽고 날이 세자 제자들이 일어나 아침예불 과 공양을 준비하기위해

 

눈을 떠보니 법당,석탑 은 그대로 인데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다른 세상 이

 

아니던 가? 이에 보덕의 제자들은 마음의 조바심이 나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

 

큰 제자 인 명덕 이 조심스레 다가와 스승께 합장 한 후 말하니, 스님께서

 

베푸신 기적에 어찌 미거한 제자들로써 감히 아뢰올 말씀이 있사 오리까,

 

하오나 황송하게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옛 반룡산 도량에 있던 샘도 이곳으로

 

같이 옮겨 왔더라면 모두 갖추었으리라 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을 들은

 

고승 보덕은 크게 웃으며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가지고 있던 선장禪杖으로

 

동편 골짜기 근처에 내리 꽂으니 옛 반룡산 의 샘물처럼 콸콸 쏟아졌다,

 

이에 제자들은 환호하며 기뻐하니 이후 이곳은

 

날려서 세운절 즉 비래당(飛來庵)을 중심으로 경복사 란 이름과 함께

 

전주의 불교역사는 시작되었다, 고구려에서 온 고승 보덕의 불교사상은 부처님의

 

열반사상을 기본교리 로 하는 열반방등경 이 핵심경전 인 열반종涅槃宗 으로

 

경복사 산 아래에 있던 화엄종계의 근본도량 이었던 보광사普光寺하고는

 

다른 도량 이었다, 고승 보덕은 이곳 전주 경복사에 안착한 후 그의 근본이념인 열반경 의 근본도

 

량을 이곳으로 정하고 그의 문하에 있던11명의 제자들은

 

전북지역 으로 나아가 스승의 근본교리인 열반방등경을 널리 전하는데 큰 공을

 

다하였다, 현재 까지 남아 있는 보덕의 제자들이 세운 전북지역의 주요사찰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안 마이산 금당사(金洞寺) 무상화상, 제자 김취金趣 창건

 

완주 구이 모악산 대원사 : 일승,심정,대원 스님이 창건

 

전주 남고산성 남고사 : 명덕화상 668년도에 창건

 

전주 남고산성 대승사 : 지수智藪스님 창건, 고려때 고찰

 

임실 진구사지 : 적멸,의융 스님 창건

 

정읍 칠보산 유마사지 : 수정스님 창건

 

진안 중대사지 : 사대,계육 스님 창건

 

- 일연스님 이 지은 삼국유사 보덕이암 조 글에 수록

 

이렇게 큰 대사찰이 었던 고덕산 경복사를 중심으로 훗날 신라의 화엄종을 창시한

 

의상,원효 스님들도 이곳 경복사에서 열반경을 배웠고 통일신라,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초 세종6년 인1424년 모든 불교의 종파들을 강제 통합되던 시기에도

 

36本寺 중 하나로 남아 오대산 상원사 소속사찰 로 바뀐 후 승려 수70명

 

사찰전지 규모50결의 대사찰로 성장하였으며 이에 더 60결 규모에

 

승려 수100여명이 추가 되어 전북지역 사찰 중 김제 금산사 와 맘먹는 규모의 강한 대사찰로 발전

 

하던 시기도 있었다,(세종실록 에 수록)

 

 

*고려시대 경복사~

 

고려 선조8인1091년에는 승통 대각국사 의천 스님 이 이곳 경복사 비래당 에 있는

 

보덕스님의 영전에 禮를 올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시를 지었다,

 

- 삼국유사 보덕이암조  -

 

열반의 보변 평등한 교는

 

우리 스승님으로부터 전수 되었다 한다,

 

애석하다 승방을 날려온 후

 

동명왕 의 고국이 위태해졌다,

 

불교는 넓고 한이없는 바다다

 

냇물같은 유교 도교 다 받아들인다

 

가소롭다 麗왕[고구려]은 웅덩이에

 

한계를 치고 와룡이 바다로 옮아감을 알지 못 하였네

 

*대각국사 의천 경복사 비래당 에 모셔진 보덕대사 의 영전 앞에 지은 詩


*이규보 와 경복사~

 

고려시대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 신분으로 전주에 와있던 문인 이규보 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라는 책을쓰게 되고 이책을 통해 경복사 로 넘어간 기행문 과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10권[고율시편]을 통해 고덕산 경복사 와 보광사 관련 시를 쓰게 된다, 이

 

때당시 이규보 의 글을 인용한다면 주 소재지에서 1천보 떨어진

 

거리에 경복사를 가보았다,,, 1천보 란 거리는 상당한 거리로 훗날 이에 관련하여

 

추정되는 거리는 풍남문기점->평화동장승백이->꽃밭정이사거리->문정리,석구동->구이 동적

 

골->덕천->노루목재->화원->경복사 이런 순으로 역사학자 들 께서는 이렇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자료 들을 보았을때 와 동국이상국집에 있는 그의

 

시 표현대로 라면 그는 공수내를 지나->흑석골->보광재->보광사->경복사 이런순으로 갔으리라

 

생각이 들고 역사학자들 또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행월일기 글에는 흑석골,보광재 길을 통해 경복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비래암에 들러 보

 

덕대사 의 영전에 禮를 올린다음 산 아래 보광사 에 들러 묵으니

 

이틀 밤 하루 낮을 경복사 비래암,보광사를 돌아 다니보고 주지스님 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청을 받아 시를 지어주었다, 라고 썼다,

 

*[동국이상국집10권 고율시편]中경복사 관련 시

 

경복사 길에서 짓다景福寺 路上作

 

길이 구불구불 벽산을 감돌아 드니(보광재 주변 풍경묘사)

 

사모가 소나무에 부딪쳐 가지에 걸리누나(경복사지에 있는 소나무)

 

목이 마르나 깊은우물 움켜마시기 어렵고 그윽한 꽃옆으로 지나가다

 

꺾어들고 구경했네

 

잠자리는 맑은시내 위를 날아가고 도마뱀은 풀속으로 쏜살같이 도망 가누나

 

산길에 중의 인도를 바랄 필요없네

 

풍경소리 나는곳이 바로 절간이 겠지,

 

시월팔일 경복사를 유람하고 이튿날 비래방장을 찾아가 보덕성인 의 영정을

 

처음 뵈었다 현판위에 종령수좌宗聆首座내한內翰이인로 의 시가 있었는데

 

그절 의 주지가 시를 청하기에 차운해서 그 끝에 쓰다,

 

갑자기 산중의 대사가 생각나 잠깐동안 문서결재를 그만두니 몸은 나는 새보다

 

먼저 반공에 솟구치고 팔은 날랜 원숭이 같이 절벽에 오른다, 복건을 쓰고 휘파람을 불며 절문에

 

이르러 다시 박쥐와 함께 저문해를 다툰다,

 

날이새자 비래당문을 두드리니 지인은 이미가고 구름도 흔적없네

 

나는 듣건데 보덕은 진실로 지인 이라는데 반룡산에 누워 몇봄이나 지냈는가

 

묵묵히 안석에 기대어 정신을 잃은 듯 다만 십일 문인과만 친했었네

 

지인의 재주는 참으로 변화 무궁하여 집 한간을 가지고 허공을 날았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길가는 나그네라 세상보기를 객관처럼 여기려 하는데

 

이땅에 어찌 꼭 내방을 들것인가 하였으니 달통한 사람 미리 앞일을 알았구나

 

갑자기 서까래마다 날개가 돋쳐 번쩍이는 전광보다 더 바쁘게 옮겨졌네

 

만약 온갖 신통력을 드러내 보인다던 땅을 파서 샘솟게 하길 종기째듯 했으련만

 

명덕은 어찌해서 못 옮김을 한했던가 성인은 때로 미묘한 조화를 숨기고 일부러

 

인간에게 장애 있음을 보이느니 자세히 이 이치를 생각하면 정말 진리가 있는 것이네 이 비례방장

 

만 옮겼다고 말하지 말라 크게는 수미산도 겨자씨에 넣을수

 

있다네 우리대사 어느해에 이산에 살았는가 우습다, 긴 세월이 손가락 튀기듯

 

잠깐인 것을 옛일 더듬어 글귀 찾아 읊자니 양쪽 귀밑 센털과 바꿔 시 얻었네

 

*경복사 의 폐사廢寺~

 

이렇게나 일천한 역사를 가진 고덕산 경복사 는 어떠한 환경에 의해 폐찰되는 운명을 맞이 하게 된

 

것일까? 절의 역사와 폐사하기까지 의 글을 보려면

 

조선중기1530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전주부 사찰조 에 보면

 

경복사 는 고덕산에 존재한다고 쓰여있다, 1765년에 집필된 여지도서 란 지리지에도 역시 경복사

 

존재함,1799년 전국 사찰현황을 소개한 범우고梵宇攷

 

란 책에도 보덕대사 비래방장이야기 와 함께 역시 존재한다 라고 쓰여 있지만

 

지역주민분들사이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조선후반기 까지 경복사 는 존재를

 

했었지만 지금현재 남아있는 최후의 법당터(옛 재실터)에 남아있던 승려들은

 

인근 보광사 가 강제 폐찰되어 이절에 있던 스님들이 모두 모악산으로 떠나가

 

이곳 경복사도 세인들의 무관심속에서 근근히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절을

 

지키고 있었는데,어느날 절인근 우물물(보덕대사가 선장으로 꽂아 만들어진 우물)

 

이 바짝말라 더 이상 샘물이 나오지 않자, 이곳에 남아있던 승려들 또한 절을 버리고 모악산으로

 

갔다라는 후문後文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가 전부여서

 

고덕산 경복사 의 전체적인 역사,발전과정,폐사된 원인 등 역사적인 사료가

 

부족하여 아직까지도 지역주민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간간히 들을수 있는 것이 경복사 역

 

사의 전부이다,이외에도 전북대 박물관에서 1977년 2차례발굴조사보고서 등 경복사 관련 자료들

 

은 그런데로 많이 남아있다,

 

 

◐고덕산 보광사普光寺◑

 

( 비구승 중향 ~ 불교중흥의 꿈을 이루다 )

 

고덕산 경복사 와 쌍벽을 이루는 대사찰 로 위치는 전주시내 남쪽 평화동 방향으로 가다보면 옛 공

 

수내 다리 사거리(서학동 흑석골 사거리)를

 

만난다, 이곳 사거리에서 흑석골 로 진입하면 흑석골 버스종점이 나온다, 이곳

 

버스종점에서 평화동 학산鶴山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40여분 깊은숲길을

 

지나게 되면 큰 당산나무2그루가 있는 전주 불교역사의 옛길고개 인 보광재

 

고갯마루 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곳 보광재 는 아득했던 그 옛날 ~ 고개넘어

 

완주 구이면 평촌리 에 있던 보광사 와 경복사 가 큰사찰 로 발전하던 시기에

 

우리 전주사람들이 불심佛心의 참례參禮 로 넘던 옛길 이었다, 조선시대 로

 

넘어 오면서부터 왕권에 의해 보광사 가 36본사찰에서 제외된후 강제폐찰 이

 

이루어진 후로는 완주 구이면,임실 신덕,운암면 주민들이 전주로 드나들던

 

지름길로 민초民草 서민들이 주로 이용되고 많이 쓰이던 애환서린

 

옛 고갯길 이었다, 특히나 이곳 보광재 길은 완주 구이면에서 나던 열무(김치종류)

 

를 전주 남밖 장(남부시장)으로 내다 팔기위해 쓰이던 길이 었다,


♣당산나무 할아버지가 들려주는[보광재 스토리텔링]이야기♣

 

(전주 고덕산 보광재 고갯마루에 있는 2그루의 둥구나무[당산堂山]께서

 

들려주는 이야기 로 씀

 

보광재 란 의미는 한자 그대로 풀이를 하면 넓게퍼지는 빛의 고개 로 설명해 드릴수가 있어요, 그

 

넓게퍼지는 빛은 불교적 이념하고도 뜻이 같을수가 있는데

 

본시 원래의 보광사 의 한문은 보배로울보 에 빛광(寶光)이 맞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요,대부분의 불교사찰들을 가 보더라도 보광명전 의 한자들이 대부분

 

보배로울보寶를 많이쓰고 있어서 고덕산 보광사 의 보 는 보배로울 보 가 맞다고

 

볼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언제부터 보배로울 보가 다시 넓을보 로 바뀌어진 것에

 

대한 정답은,조선후반기1799년 정조임금 때 만든 책 범우고梵宇攷란 책 전주 부

 

사찰 조를 보면 (어려운 한자는 생략) 내용은 이렇게 쓰여 있답니다?

 

보광사 는 고덕산에 있는 사찰로 비구승 중향이 고려시대 고룡봉이란 사람으로부터

 

큰 후원을 받아 재물과 피륙을 배풀어 크게 중흥이 이루어 졌는데 조선시대 로

 

들어오면서부터 자주 폐찰되었다, 완전히 절이 없어진후 이곳에 있던 스님들은

 

모두 모악산으로 갔는데 이에 절이름을 보광普光이라한다, 라고 말하였지요,

 

이러한 연유로 그후 , 그 이전 에 쓰여 진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란 지리지에도

 

보배로울보 가 아닌 넓을 보를 써서 보광사 로 표기되 었어요,

 

이는 다른의미로 불법을 널리 전파한다 라는 뜻도 지닌 좋은이름 이 랍니다,

 

이렇게 불교의 역사적 의미가 큰 고덕산 보광사 는 창건된 시기가 옛 문헌에는

 

삼국 백제(어떤책에는 후백제때 로 의미해석)때 창건된 대가람으로~ 이렇게

 

시작이되는 글들이 대부분 쓰여있어 창건시기 는 삼국백제 때로 생각해 볼수가 있겠어요, 이에 합

 

당한 이야기를 해보면요~고구려의 고승 보덕대사께서 이곳 백제

 

땅 완산주 로 자신의 거처인 방장方丈을 날려 이곳 고덕산에 안착 된 이후 이곳

 

비래당(庵)을 중심으로 절은 점점커가게 되고,스님들 숫자도 늘어나게 되자~

 

절이름 을 경복사景福寺라 하고 고덕산 골짝골짝 마다 절이 지어지게 되는데,

 

아마도 보광사 란 절도 이곳 경복사 의 부속 암자로 조그맣게 있다가 통일신라

 

로 넘어오면서부터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이곳 완산주 에 당도 하여 신라의

 

국교國敎인 화엄불교(종)의 근본도량 사찰을 세우게 되지요, 그절의 이름은

 

우리 전주에서 김제 금산사로 가보게 되면 청도 란 이름의 마을하나 가 있는데

 

그 마을안에 는 귀신사歸信寺란 절이 있답니다, 그 귀신사 란 절이 바로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

 

한 우리고장 전주의 화엄불교 로 처음지어지게 된 화엄종계 의

 

절이랍니다, 이러한 모악산 귀신사 의 화엄불교가 우리고장 전주로 완전하게

 

퍼지기 위해 스님들이 불법을 전하러 다니게 되는데, 이곳 보광사 터에 오고난후

 

완산이란 도시와 가까운 이곳 경복사 대웅전 아래에 있는 부속암자 자체를 전주지역 화엄불교의

 

중심사찰로 발전하게 되지요, 옛 문헌에도 고덕산 에는

 

경복사 란 절과 보광사 란 절이 있는데, 경복사 는 보덕대사 의 열반불교 의

 

근본도량이고 보광사 는 화엄불교의 근본도량 의 절 로 말하고 있어 이곳 고덕산

 

보광사 는 전주지역 화엄불교 의 근본도량 의 중심사찰로 발전하게 되었답니다,

 

당시 불법의힘은 누가 쎄었을까요? 정답은 보광사 의 화엄불교 가 쎄었답니다,

 

왜냐하믄 의상의 화엄불교가 당시 정부인 통일신라 때 국가의중심종교였기 때문에

 

상대적 으로 보광사 보다 산위의 보덕의 열반불교 보다는 불법의 힘이 클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전주의 화엄불교 중심사찰로 자리를 굳힌 고덕산 보광사 는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부터 엄청나게 큰 대사찰로 성장하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답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지요, 이 이야기는 고려시대 전주지역 한산이씨 인

 

가정 이곡 이란분이 쓰신 중흥대화엄보광사기 란 제목의 쓴글로 술술 이야기를

 

해볼께요, 전주 남쪽 고덕산 에 절이 있으니 이것을 보광사 라 한다,

 

이는 백제로부터 내려오는 큰절이다, 비구승 중향 이 어려서 이절에서 자랐는데

 

그 절이 황폐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개연히 중흥시킬뜻을 품었는데 전주사람 출신

 

중에 당시 환관還官으로 있던 資政使 고룡봉 공이 임금의 우대를 받고 성품또한

 

착한일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원통 갑술년에 서쪽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고룡봉을 만나게 된다, 중향 이 그에게 말하기를 고공 은 변방에서

 

태어난 몸으로 큰나라 에 와서 이토록 뜻을 이루었으니 어찌 인과 가 아니겠습니까? 공께서 는 임

 

금의 측근에서 주야 로 모시면서 곁을 떠나지 않으니

 

임금 의 은혜로움 으로 타는 수레 의 아름다움을 고향의 친척 과 친구들이 알 까닭

 

이 없으니 이른바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 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고 공께서 이곳 고향에 절을 지어 위로는 임금을 위해 축원을 빌고 아래로 는

 

대중들 과 복을 같이 하여 가장높고 영화로운 자리로 돌아갈 장소를 마련한다면

 

낮에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가는 영광의 격식으로 비추어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니 고 공은 흔연히 승낙을 하게 되고 천민에 상당하는 많은 재물들을

 

내 놓아 새로이 사찰건립에 필요한 모든준비 를 하게 되었다, 우선 삼장 의

 

경,율,론을 두게하고 그후 고 공은 재상이 되어 고향 인 완산으로 돌아오게 되고

 

중향 또한 보광사 로 돌아와 새로운 사찰건립을 위한 기초수리를 하고 하루속히

 

고 공이 빨리 오기를 빌었다, 지정개원 일인 1341년02월에는 고 공이 모든 간신

 

들을 몰아내고 바르게화합하는 근본을 바로세우고 바람과 천둥번개처럼 큰 호령을

 

발휘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처럼 일사분란 하게 일처리를 완벽히 하여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아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중향스님이

 

그를 서운하게 여겨 약속한 재물비용을 더 독려하여 공사를 마무리 짓게 하였다,

 

절의 완공을 알리기 위해 중향스님은 보광사 절에서 목소리를 높여 불경을 크게

 

암송을 하게 된다, 이를 알게된 신도 들은 불전에 재물을 내놓으니 전부 합한 것이

 

일천에 달하는 사람이2만5천명 이요, 황금물 로 칠을 해서 불상을 새롭게 만든사람 이 15명이며

 

백금으로 그릇을 색칠장식 한 사람이30명이 었다, 무릇 지은건물 은

 

1백개나 되는데(여기서 비교해야할 부분은 이곡선생 의 중흥대화엄보광사기문 에 관한글을 조선

 

초기 서거정 이란 분이 쓰신 동문선東文選이란 책에도 같은제목의

 

글이 있는데,이글에서 는 이부분을 절 기둥이1백개 요 절 양쪽으로 불전에 승당 손님 주지스님방

 

해장海藏에 향적香積을 두르니 그 모습은 위엄스럽게 빛나고

 

파도소리濤雷같으며 복도 와 행랑을 만들고 담장을 둘러놓았다,

 

[ 서거정 의 동문선 중 중흥대화엄보광사기重興大華嚴普光寺記 편 ]

 

이부분에서 다른 인문지리지에 있는 보광사 기문 과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내용이다, 이어서~

 

역사歷史는1337년(정축년)봄인 고려 충숙왕때부터 시작하여 6년후인 (계미년)1343년 충혜왕 겨

 

울에 완공을 보아 완공하는 그달에 인연이 있는

 

신도들을 모아 큰 화엄법회를 열어 사찰 낙성식을 성대하게 치루니 그동안에

 

쓴 일꾼이3천명이요 시일은50 여일이 걸렸다 선비와 부녀자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공양하고

 

부처 의 은덕을 찬탄(감탄)하던 신도들의 수가 헤아리기

 

힘들정도로 온 산골짝 마다, 가득차 있으니 이에 중향은 본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옮다하여 고 공의 명으로 나(이곡)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한 것이다, 삼가 생각

 

하건데 견훤씨 가 본국(백제)에 들어온지 4백년이 넘는다,

 

절은 비록 백제 때 창건 되었으나 여러차례 큰 전쟁으로 비석 이나 기문 도 없이

 

그세월 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혹은 일으킬 때도 있고 혹은 폐하더니 오늘에

 

이르러 반드시 고 공을 기다려 비로소 옛날의 모습을 복구 하게 되었다,

 

공은 삼한땅 에 태어났으니 경사로부터 5천리 인데 이렇게 나마 인연으로 닿아

 

일월같은 천제 의 빛에 의지하고 비와 이슬같은 큰 은혜를 입었으니 고국 의 물결 이 어찌 크다 이

 

르지 않겠는가? 또 불사를 크게 일으켜 베풀고 복을 빌고 근본을 갚아서 망극에 드리우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참고자료[ 전주 한산이씨 가정 이곡선생께서 쓰신 중흥대화엄보광사기 문 ]

 

-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범우고 원문 , 완역 완산지 전문(전주부 사찰조 편)

 

- 완산고을 의 맥박(작촌 조병희 저)


註 : 번역 그대로 쓰면 어려운 한자 가 들어가게 되고 다소 다른분들 이 이해가 안되는 문구

 

도 더러 있어 제 나름대로 쉽게 풀어쓴 글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처럼 전주지역 불교역사에 있어 한때 나마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고덕산 보광사 가 앞서도 언급

 

을 했지만 경복사처럼 왜 폐찰이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데 조선시대 로 넘어오면서부터 보광사 인근 경복사 는 조선36본사찰에 속해

 

강한 전북권의 중심사찰로 성장을 하였지만 이에 탈락된 전주지역의 모든사찰들은

 

조선초(태종 때부터 작업시작 ~ 세종때 이르러 마무리를 지음)예조에서 올리는 간언들을 통해 전

 

국적으로 뒤섞여있는 선종,교종의 불교종파들을 강제적으로 통합하게 되어 36본사에 들지 못한

 

전주의 사찰들 대부분 이 강제로 폐찰이 되는 첫 번째 운명을 맞이하게 되고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

 

재란 등의 큰 전쟁으로 김제

 

금산사 등의 큰절까지 모두 화재로 폐찰되는 두 번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답니다,

 

특히나 전주 는 조선왕조 의 본향 인점을 들어 군사방어 기능을 둔4고사찰의 중건외에는 폐찰된

 

대부분의 사찰들이 조정의 강제적인 통합작업으로 인해 대부분

 

모악산 인근 절로 모두 이건이 되어 오늘날에 와서는 전주지역에는 금산사처럼 큰절이 없다, 이렇

 

게 빈절로 남게 된곳은 강제로 헐리게 되고 석탑들은 무너뜨리고 해체를 시켜 완전히 망가지게되

 

고 절을 받치던 큰 주춧돌들만 남게되어 전주지역

 

모든 폐찰된 절터의 흔적들을 보면 이러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한가지 예로 이야기를 하면 고덕산

 

보광사 가 없어진후 남게된 유물중하나가 5층석탑은 해체되지 않은체로 일제감점기때까지 남아있

 

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석탑또한

 

일본인들이 강제로 해체하여 한때 전주 덕진공원으로 옮기게 되고 이를 다시 타지역으로 반출이

 

되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실정까지 오게됨,

 

전북대 박물관 앞에있는 옛 봉림사지 불상을 보아도 조선시대 불교배척정책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한부분이다,

 

오늘 소개한 고덕산 보광사 는 전주지역 에까지도 그 영향력이 컸던 사찰로 생각을 할 수가 있겠고

 

요, 이러한 보광사 란 절이 있음으로 인해 전주시 서학동 흑석골에서 완주 구이면 평촌리 상하보

 

마을로넘어가는 고개명또한 보광사의 보광의 이름을 따와 보광재 또는 엎드린 호랭이가 눈을부릅

 

뜨고 있는 모습이라하여 엎드릴복자 에 목덜미항자를 써서

 

복항치伏項峙 또는 보광치 라고도 불리우는 옛 지명이다, 이와같이 서학동 보광재옛길 곳곳에는

 

큰느티나무(흑석골버스종점에 있는 당산나무 수령이300년정도)라니 보광재 정상에 있는 당산나

 

무 또한 수령이 그정도로 되리라는 생각이듬, 우람한 느티나무들이 옛길가 곳곳에 일직선으로 나

 

열되 있어서 그~옛날 선인先人들께서 이곳이 원길임을 알수있게하는 지혜도 엿볼 수 있는 지역명

 

소자원 중 하나이다,

 

자원의 위치 : 보광사(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상하보마을중 하보마을522번지전체) 

 

현재에는 이곳 옛 보광사터 에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불상연화좌대 와

 

석등연화좌대 가 남아있으며 상하보마을 주변 곳곳으로 옛절터에 쓰였을듯한

 

주춧돌 들과 미륵불을 모셔놓은 누석단이 옛 5층석탑자리에 있고 累石壇에 있는

 

미륵불 외에 돌불상 도 같이 있었는데 이불상은 도난되어 없어지고 미륵불만 남게 되었음, 주로 이

 

마을 의 당제 나 칠월칠석, 석가탄신일 때 이곳에서 간소하게 제를 지낸다함,

 

◈東文選 의 또 다른 전주 고덕산 보광사 기록 글인 가정 이곡 선생께서 쓰신

 

  신작심원루기新作心遠樓記◈

 

(고려 말1343년 전주 고덕산 보광사 중흥 이후 비구승 중향 은 이곡 선생 에게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절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절 전체를 바라볼수가 없어서

 

누정을 지었는데 그에 걸맞는 이름을 청하니? 이곡 선생은 내가 아직 누정

 

을 규모가 얼마이고 보질 못했는데 억지로 이름을 지으라면 귀머거리에게 듣기를 부탁하고 소경에

 

게 길을 묻는 것이다, 라 하니 이에 중향은 인생이 하늘과 땅의 기운이 타고 나는데 오행이 서로 소

 

용되나 사시로 쓰이는 것이 같지 아니하니

 

겨울에는 따뜻한 것을 욕망하고 여름에는 서늘한 것을 요구하며 깊이 들어 앉아서

 

생각하는 바를 간추리고 높은데 올라서 마음과 정신을 펴니 이것은 보통 인정으로 서 이치가 그런

 

것 이다, 이제 내 절은 사방으로 산이 둘러있어 땅이 얕고 또 좁은지라 그 경내에 들어오면 담이 둘

 

러쌓인 속에 들어온 것 같으므로 이 樓를

 

지은 것이 보기에 아름다움을 위하여서가 아니요 여기에 살고 여기에 손님된 자로 하여금 그 무더

 

운 것이 찌는 듯 하고 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울창하여 땀이 흘러 몸뚱이를 덮고 기식이 실날 같은

 

때라든가 혹은 봄에 꽃이 산에 덮여있고 가을에 달빛이 골짜기에 가득할 때 차를 끓여 마시면서 올

 

라앉으면 가슴속 의 번민한 것을 제거하고 막힌 것을 도려낼 것이다,그대가 어찌 강경히 거절을 하

 

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이곡선생은 내가 들으니 불법을 배우는 무리들은 그 형상을 마른나무

 

같이하고 그 마음을 찬재같이 하나 오직 산이 깊지 아니하여 사는데 궁벽하지 않아서 바깥물건을

 

녹이는 바가 될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벽에 얼굴을 대고 돌아보지 않는 자 있고 새가 둥우리 속

 

의 홰를 타듯이 하는자도 있으며 바위굴

 

속에 그 방을 만든 자 도 있었다, 만약 사는곳이 궁벽한 것을 싫어하여서 큰집을

 

시원하게 지어 사치하며 깊은산을 혐오하여 대나무를 높게하고 누워 때와 명절에

 

오르내리면서 스스로를 쾌적하고 스스로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비록 우리 儒林이라도 검소한자는

 

역시하지 아니하겠거늘 불교하는 자가 그것을 하겠는가?

 

그러나 이미 누 가 준공 되었고, 대사께서 청하는 것이 또 근간한지라

 

우선 지벽심원地僻心遠이라는 뜻을 취하여 붙이라고 하였다,

 

(참고자료 : 완주향토사료지 1996완주문화원 간행)

[사진은 경복사지 대웅전으로 활용되었던 절터의 모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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